흑암절벽의 입구는 이미 낮의 고요를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수천 개의 횃불이 밤의 장막을 찢어발기며 붉은 혀를 내둘렀다.
그 일렁이는 불빛 아래로 철갑을 두른 청운검문의 무사들이 숲을 이루었다.
기름 타는 냄새가 매캐하게 코끝을 찔렀다.
설무한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가파른 오르막길을 한 걸음씩 밟아 나갔다.
지하 감옥의 습기와 이끼 냄새가 여전히 옷자락 끝에 매달려 있었다.
손목과 발목에 남은 쇠사슬 자국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타는 듯한 통증을 뱉어냈다.
뼈마디가 비명을 질렀다.
품 안에는 위조된 문서가 든 낡은 서신 꾸러미가 묵직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것은 독이자, 동시에 유일한 칼날이었다.
멀리 절벽 끝단에 세워진 거대한 정자 아래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청운검문의 차기 문주로 추대된 위진악이었다.
그는 백색 장포를 정갈하게 차려입은 채 차가운 찻잔을 만지고 있었다.
설무한의 발소리가 돌계단을 울리자 수백 명의 시선이 일제히 그를 향해 쏟아졌다.
살의와 멸시, 그리고 알 수 없는 호기심이 뒤섞인 시선들이었다.
위진악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스승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에는 여전히 예의 바른, 그러나 속을 알 수 없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스승님.
위진악의 목소리가 산들바람에 실려 부드럽게 퍼졌다.
설무한은 대답 대신 품에서 서신 꾸러미를 꺼내 바닥에 던졌다.
마른 종이 뭉치가 돌바닥에 부딪히며 힘없는 소리를 냈다.
네놈이 꾸민 가짜 장부다.
설무한의 목소리는 갈라진 논바닥처럼 푸석거렸다.
위진악은 찻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계단을 내려왔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종이 뭉치를 힐끗 보더니 가볍게 콧방귀를 뀌었다.
스승님은 여전히 고지식하시군요.
위진악이 좌중을 둘러보며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의 손에는 황금색 비단으로 감싸인 두툼한 두루마리가 들려 있었다.
강호는 진실이 아니라 기록을 믿습니다.
그가 두루마리를 펼치자 붉은 직인이 찍힌 문구들이 달빛 아래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것은 설무한이 마교의 밀사와 내통하여 문파의 비전 무공을 넘기려 했다는 제2의 증거였다.
주변에 포진해 있던 장로들과 제자들 사이에서 거친 웅성거림이 터져 나왔다.
배신자라는 고함이 숲의 짐승 소리처럼 사방에서 들끓었다.
설무한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자신이 문파를 위해 흘린 피가 기록 한 줄에 오염되는 광경은 칼에 베이는 것보다 아팠다.
목 안쪽이 뜨거워졌다.
단전 깊숙한 곳에 똬리를 틀고 있던 한빙주의 냉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혈맥을 타고 흐르는 기운은 이미 정순한 도가의 진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것을 얼려버릴 듯한 파괴적인 한기였다.
설무한의 손끝에서 푸르스름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공기 중의 수분이 순식간에 결정이 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위진악의 눈썹이 움찔하며 위로 치솟았다.
그는 뒤로 반 보 물러나며 자신의 검자루를 움켜쥐었다.
설무한은 폭발하듯 끓어오르는 냉기를 억누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 고통을 동력 삼아 전신으로 뿜어냈다.
파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발치에서부터 서리가 뻗어 나갔다.
횃불의 열기조차 침범하지 못하는 절대적인 빙점의 공간이 형성되었다.
설무한이 허공을 향해 손을 뻗자, 차가운 검기가 실체화되어 날카로운 궤적을 그렸다.
그것은 청운검문의 검법이 아니었다.
배신당한 자의 사무친 원한이 빚어낸 얼음의 칼날이었다.
위진악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며 급히 검을 뽑아 휘둘렀다.
강렬한 화염의 기운이 깃든 검강이 설무한의 한빙진기와 맞부딪혔다.
콰앙.
귀를 찢는 듯한 굉음과 함께 수증기가 폭발적으로 피어올랐다.
주변의 무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동그라졌다.
안개 속에서 설무한의 신형이 유령처럼 위진악의 턱밑까지 파고들었다.
그의 손가락이 위진악의 목을 노리고 매서운 곡선을 그렸다.
위진악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소매 안에서 암기를 사출했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독침이 설무한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피가 맺히기도 전에 상처 부위가 하얗게 얼어붙었다.
설무한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괴물처럼 다시 손을 뻗었다.
위진악의 신법은 빠르고 유연했으나, 사방을 뒤덮은 한기가 그의 움직임을 둔탁하게 만들었다.
장포 자락에 서리가 내려앉아 바스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위진악의 눈에 처음으로 초조함이 서렸다.
스승이 이런 기괴한 무공을 숨기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네놈의 가식도 여기서 끝이다.
설무한이 낮게 읊조리며 오른손을 가로로 그었다.
한빙주의 기운이 응집된 거대한 검기가 반월형으로 허공을 갈랐다.
위진악은 급히 내공을 끌어올려 방어막을 형성했으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밀려났다.
그의 발이 돌바닥을 긁으며 깊은 고랑을 만들었다.
멈춰 선 위진악의 호흡이 거칠게 가라앉았다.
그의 백색 장포 오른쪽 소매가 설무한의 검기에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찬바람이 찢어진 옷 사이로 파고들자 위진악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 순간이었다.
위진악의 품 안에서 무언가 툭 하고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달빛을 머금은 매끄러운 옥의 광택이 어둠 속에서 유난히 도드라졌다.
그것은 십 년 전, 설무한이 제자 위진악에게 손수 깎아 선물했던 옥비녀였다.
스승이 제자의 성취를 기특하게 여겨 자신의 보물을 녹여 만든 유일한 징표였다.
바닥에 떨어진 옥비녀는 차가운 돌바닥 위에서 처량하게 빛났다.
위진악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여유롭던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그는 마치 심장을 도려내진 사람처럼 멍하니 옥비녀를 응시했다.
설무한의 공격이 멈추었다.
검기를 머금었던 그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갈 길을 잃고 멈춰 섰다.
진실을 기록으로 덮겠다던 사내의 품속에 가장 진실된 기억이 남아 있었다.
위진악의 손가락이 소매 안에서 눈에 띄게 경련하기 시작했다.
그는 옥비녀를 줍지도, 그렇다고 외면하지도 못한 채 제자리에 굳어버렸다.
서늘한 밤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질러 절벽 아래로 사라졌다.
위진악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리며 설무한의 시선과 마주쳤다.
그의 입술이 무언가 말하려는 듯 달싹였으나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정막 속에서 옥비녀의 매끄러운 표면 위로 위진악의 눈물 한 방울이 투명하게 떨어졌다.
설무한은 그 눈물을 보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푸른 서리가 맺힌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한기가 아니라, 억눌렀던 기억의 무게 때문이었다.
위진악은 떨리는 손으로 바닥의 옥비녀를 더듬어 쥐었다.
옥의 차가운 감촉이 그의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그는 비녀를 쥔 채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청운검문의 무사들이 당황하여 서로의 눈치를 보았다.
차기 문주가 배신자 앞에서 무릎을 꿇는 광경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위진악의 어깨가 들썩이며 소리 없는 오열을 토해냈다.
그의 눈물이 옥비녀를 타고 흘러 바닥의 서리를 녹였다.
설무한은 검기를 거두고 위진악의 앞에 섰다.
그는 제자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리려다 멈추었다.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사실이 가슴을 짓눌렀다.
위진악은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비녀를 가슴팍에 바짝 끌어당겼다.
그것은 그가 가진 유일한 안식처이자, 동시에 가장 수치스러운 증거였다.
이것을 아직도 가지고 있었느냐.
설무한의 목소리가 밤안개에 젖어 낮게 깔렸다.
위진악은 대답 대신 비녀를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의 손등 위로 굵은 핏줄이 불거져 나왔다.
그는 스승을 배신하던 날 밤에도 이 비녀를 품에 넣고 있었다.
자신이 걷고자 하는 길이 얼마나 추악한지 스스로에게 증명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비녀는 그를 심판하는 가장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있었다.
위진악은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죽여 주십시오.
그의 목소리는 비굴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것을 내려놓은 자의 허망함이 섞여 있었다.
설무한은 제자의 정수리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서 푸른 한기가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갈 곳 잃은 슬픔과 깊은 피로뿐이었다.
설무한은 위진악의 어깨를 밀치고 정자를 향해 걸어갔다.
그의 걸음걸이는 아까보다 훨씬 무거워 보였다.
위진악은 바닥에 엎드린 채 스승의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는 자신의 목을 베지 않고 지나가는 스승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그것이 가장 가혹한 형벌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설무한은 정자 기둥에 걸린 청운검문의 깃발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비단 천이 찢어지는 소리가 고요한 밤의 공기를 갈랐다.
그는 찢어진 깃발을 바닥에 내던지고는 절벽 끝으로 다가갔다.
수많은 무사들이 그를 포위하려 했으나 누구도 선뜻 발을 떼지 못했다.
설무한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그들의 의지를 꺾어 놓았다.
그는 절벽 아래의 어둠을 응시하며 숨을 크게 들이켰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 깊숙이 파고들어 정신을 맑게 깨웠다.
위진악이 비틀거리며 일어나 스승의 등 뒤로 다가갔다.
그의 손에는 여전히 옥비녀가 쥐어져 있었다.
그는 스승의 뒷모습을 향해 검을 뽑으려 했으나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스승이 가르쳐준 첫 번째 검식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것은 사람을 죽이는 기술이 아니라, 사람을 지키는 마음이었다.
위진악은 자신의 가슴을 짓누르는 죄책감에 숨이 막혔다.
그는 결국 검 손잡이를 놓아버리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설무한은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기록은 네놈이 바꿀 수 있어도, 기억은 바꿀 수 없다.
그의 목소리는 바람에 섞여 멀리 사라져 갔다.
설무한은 절벽 아래로 몸을 날렸다.
위진악은 비명을 지르며 절벽 끝으로 달려갔다.
그의 손에서 떨어진 옥비녀가 허공을 가르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절벽 아래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이 위진악의 얼굴을 때렸다.
그는 어둠 속을 멍하니 바라보며 손을 뻗었으나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스승의 신형은 이미 짙은 안개 속으로 완전히 잠겨버린 후였다.
주변을 에워쌌던 무사들이 조심스럽게 위진악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패배자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위진악은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옥비녀의 감촉이 남아 있던 자리에 차가운 밤이슬만 맺혀 있었다.
그는 문득 자신이 얻으려 했던 권력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느꼈다.
기록된 진실은 거짓이었고, 그가 버린 기억만이 유일한 진실이었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메마른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웃음소리가 흑암절벽의 계곡을 따라 처량하게 메아리쳤다.
다음 날, 청운검문의 기록관은 새로운 문주 위진악의 명령을 받았다.
설무한이라는 이름은 문파의 역사에서 영원히 지워졌다.
그는 횡령과 배신을 일삼다 절벽에서 투신한 파렴치한으로 기록되었다.
위진악은 기록관이 적어 내려가는 글자들을 무표정하게 지켜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야망도, 증오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텅 빈 허무만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는 집무실 구석에 놓인 낡은 목함을 열었다.
그 안에는 깨진 옥비녀 조각들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그가 절벽 아래를 며칠 동안 뒤져 찾아낸 유일한 유물이었다.
위진악은 그 조각들을 하나하나 만져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피가 배어 나왔으나 그는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문밖에서 장로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새로운 질서를 세워야 한다는 그들의 요구는 집요하고 탐욕스러웠다.
위진악은 목함을 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문을 열고 나가기 전, 벽에 걸린 청운검문의 상징을 보았다.
구름 위를 날아오르는 청운의 기상이 오늘따라 유난히 초라해 보였다.
그는 긴 숨을 내뱉으며 문고리를 잡았다.
자신이 만든 지옥으로 다시 걸어 들어갈 차례였다.
그는 문을 활짝 열며 밖에서 기다리던 장로들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는 다시 차가운 권력자의 빛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그의 품 안에서는 깨진 옥 조각들이 서로 부딪히며 서글픈 소리를 내고 있었다.
"준비는 끝났다. 이제 정무맹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