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암절벽의 대기는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해발 수천 척 높이의 고지대에서 불어오는 칼바람이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발아래로 펼쳐진 심연은 집어삼킬 듯 검은 입을 벌리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진 옥비녀 조각이 희미한 달빛을 반사하며 차갑게 빛났다.
설무한의 시선이 그 조각 위로 머물렀다.
위진악의 눈동자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소매 안으로 손을 급히 감추며 뒷걸음질 쳤다.
비겁함과 경악이 뒤섞인 기색이 그의 하얀 얼굴 위로 스쳐 지나갔다.
설무한은 대답 대신 단전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한빙주의 기운을 깨웠다.
심장 부근에서 시작된 오한이 혈맥을 타고 전신으로 뻗어 나갔다.
파괴되었던 경락이 푸른 냉기에 휩싸이며 억지로 이어졌다.
입술 사이로 하얀 김이 새어 나왔다.
그의 주위에 머물던 안개가 순식간에 서리로 변해 바닥에 내려앉았다.
설무한의 오른손이 허공을 움켜쥐자 대기 중의 수분이 응결되며 날카로운 얼음 칼날을 형성했다.
위진악이 검을 뽑아 들었다.
청운검문의 정종 심법인 자하진기가 그의 검신을 타고 보랏빛으로 타올랐다.
"죽었어야지. 왜 돌아와서 추한 꼴을 보입니까."
위진악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설무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한 걸음을 내디뎠다.
발이 닿는 곳마다 지면이 쩍쩍 갈라지며 얼어붙었다.
위진악이 먼저 움직였다.
그의 신형이 구름처럼 흐릿해지더니 순식간에 설무한의 가슴팍으로 파고들었다.
청운검문의 금지된 초식인 운해혈영이었다.
수십 개의 검영이 환상처럼 펼쳐지며 설무한의 전신을 압박했다.
검끝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울려 퍼졌다.
설무한은 눈을 감았다.
감각이 예민해졌다.
검이 공기를 가르는 궤적, 위진악의 호흡, 심지어는 떨리는 근육의 파동까지 느껴졌다.
그는 몸을 가볍게 비틀어 빗발치는 검영 사이를 유유히 빠져나갔다.
위진악의 눈이 크게 떠졌다.
자신이 펼친 초식은 사부조차 파훼법을 모른다고 장담했던 비기였다.
그러나 설무한은 마치 다음 동작을 다 알고 있다는 듯 반 박자 빠르게 움직였다.
"그 초식의 세 번째 변화는 왼쪽 어깨가 비게 되지."
설무한의 나직한 목소리가 위진악의 귓가를 때렸다.
동시에 설무한의 얼음 칼날이 위진악의 검신을 빗겨 치며 파고들었다.
쨍그랑, 하는 파공음과 함께 보랏빛 진기가 산산조각 났다.
위진악의 검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설무한은 멈추지 않고 위진악의 가슴에 손바닥을 갖다 댔다.
한빙주의 냉기가 폭발적으로 방출되었다.
위진악의 몸이 뒤로 밀려나며 바위벽에 거세게 부딪혔다.
그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울컥 쏟아졌다.
주변을 포위하고 있던 제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그들의 눈에 비친 설무한은 인간이 아니었다.
전신에서 푸른 안개를 내뿜는 귀신과 같았다.
설무한은 위진악의 목에 차가운 얼음 칼날을 들이밀었다.
위진악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설무한을 노려보았다.
"기록은 네가 썼을지 모르나, 이 흉터와 무공은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설무한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위진악의 안색이 잿빛으로 변했다.
그는 자신의 가슴팍을 움켜쥐며 헛구역질을 했다.
얼어붙은 진기가 혈맥을 타고 들어가 장부를 옥죄고 있었다.
위진악의 시선이 바닥에 흩어진 옥비녀 조각으로 향했다.
그의 눈에 고였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죄책감인지, 아니면 패배에 대한 분노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는 입술을 달들 떨며 무언가 말하려 했다.
"사부님, 저는…… 저는 그저……."
위진악의 무릎이 꺾이며 바닥에 닿았다.
그가 고개를 숙이고 모든 자백을 쏟아내려던 찰나였다.
절벽 위쪽에서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려왔다.
황금빛 광채를 내뿜는 작은 물체가 설무한과 위진악 사이의 지면에 박혔다.
그것은 정무맹의 상징인 금패였다.
찬란한 금빛이 어두운 절벽을 인위적으로 비추었다.
동시에 수십 명의 무인이 절벽 위에서 뛰어내려 그들을 포위했다.
그들의 가슴에는 정무맹 집행단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가장 앞에 선 사내가 품에서 서신 한 통을 꺼내 들었다.
"정무맹주님의 명령이다! 청운검문의 대역죄인 설무한을 즉시 체포하라!"
사내의 외침이 골짜기를 울렸다.
포위망을 좁혀오는 집행단원들의 손에는 현천망이 들려 있었다.
내공을 무력화시키는 특수한 그물이었다.
위진악은 그 광경을 보며 실성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피 묻은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에는 다시금 비열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설무한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탐욕스러운 시선들을 차갑게 읊조렸다.
그는 품 안에서 소여진이 남겼던 서신을 꺼냈다.
자신을 옭아맨 추악한 진실이 담긴 종이였다.
설무한은 그 서신을 하늘 높이 던져 올렸다.
종이 조각들이 바람에 휘날리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는 얼음 칼날을 고쳐 쥐며 정면의 집행단주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오너라. 강호의 법도가 얼마나 썩었는지 내 직접 확인해주마."
설무한은 달려드는 집행단원들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그의 발끝이 닿는 곳마다 서리가 피어올랐다.
첫 번째 단원이 던진 현천망이 허공을 갈랐다.
설무한은 몸을 낮게 엎드려 그물의 궤적을 피했다.
오른손의 얼음 칼날이 단원의 발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비명과 함께 단원이 바닥에 고꾸라졌다.
상처 부위가 즉시 얼어붙으며 피조차 흐르지 않았다.
집행단주가 눈을 부라리며 장포를 휘둘렀다.
그의 소매 안에서 수십 개의 투박한 암기가 쏟아져 나왔다.
설무한은 얼음 칼날을 회전시켜 암기들을 쳐냈다.
금속음이 고막을 자극했다.
차가운 기운이 점차 거세지며 절벽 전체를 뒤덮기 시작했다.
위진악은 그 틈을 타 제자들의 부축을 받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는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죽어주십시오, 사부님. 그래야 정무맹의 명분이 바로 섭니다."
설무한의 귀에 위진악의 목소리가 박혔다.
그는 대답하지 않고 집행단주에게 쇄도했다.
한빙주의 기운이 폭주하듯 날뛰며 그의 혈맥을 고문했다.
눈앞이 푸른 안개로 가득 찼다.
집행단주가 내지른 장풍이 설무한의 어깨를 스쳤다.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들렸으나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냉기가 감각을 마비시킨 덕분이었다.
그는 오히려 그 힘을 이용해 집행단주의 목덜미를 노렸다.
손끝에 닿은 집행단주의 피부가 순식간에 창백하게 변했다.
그가 경악하며 뒤로 몸을 날렸다.
설무한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한기가 대기를 얼리며 결정체를 형성했다.
그것은 마치 만개한 연꽃과 같은 형상이었다.
청운검문의 절예 중 하나인 빙화만개였다.
아름다운 광경과는 대조적으로 그 위력은 절멸에 가까웠다.
꽃잎처럼 흩어지는 얼음 조각들이 집행단원들의 신체를 파고들었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설무한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단주를 노려보았다.
"정무맹의 개들이 이리도 허약했나."
단주는 분노로 얼굴을 붉히며 다시금 신형을 날렸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묵직한 강철 편이 들려 있었다.
편이 휘둘러질 때마다 바위가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설무한은 얼음 칼날로 편의 궤적을 흘려보냈다.
충돌할 때마다 손목이 저릿했다.
내공의 소모가 극심했다.
한빙주가 주는 힘은 강력했으나 육체가 견디기에는 과분했다.
피부 곳곳이 동상에 걸린 듯 검붉게 변했다.
그럼에도 그는 멈출 수 없었다.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기회는 오직 지금뿐이었다.
설무한은 남은 내공을 모두 끌어모아 얼음 칼날에 주입했다.
칼날이 푸른 빛을 내뿜으며 거대하게 팽창했다.
그는 그것을 단주를 향해 일직선으로 내질렀다.
단주가 강철 편을 교차시켜 막아섰으나 소용없었다.
얼음 칼날은 강철을 관통하고 그의 가슴팍에 깊숙이 박혔다.
단주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는 피를 토하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포위망이 순식간에 와해되었다.
남은 단원들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설무한은 그들을 지나쳐 위진악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위진악의 안색이 다시금 흙빛으로 변했다.
그는 제자들을 밀쳐내며 절벽 끝으로 도망쳤다.
"오지 마! 오지 마십시오!"
설무한은 피 묻은 얼음 칼날을 바닥에 끌며 다가갔다.
소름 끼치는 마찰음이 정적 속을 파고들었다.
위진악은 벼랑 끝에 몰려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그의 뒤로는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만이 존재했다.
설무한이 그의 눈앞에서 멈춰 섰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엉켰다.
설무한의 눈에는 분노도, 슬픔도 남아있지 않았다.
오직 시린 얼음과 같은 무심함만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천천히 얼음 칼날을 들어 위진악의 심장을 겨누었다.
위진악은 눈을 감으며 체념한 듯 고개를 떨궜다.
그 순간 설무한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한 오라버니, 멈추세요!"
설무한의 손이 멈췄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은 절벽 위쪽이었다.
그곳에는 죽은 줄로만 알았던 소여진이 서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설무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의 등 뒤로 정무맹의 고수들이 칼을 빼 들고 나타났다.
소여진은 그들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려 했다.
설무한은 본능적으로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그의 몸은 이미 한계를 넘어서 있었다.
단전에서 역류한 냉기가 그의 혈맥을 강제로 뒤틀었다.
그는 컥, 하는 소리와 함께 무릎을 꿇었다.
위진악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검을 집어 들었다.
그는 광기 어린 눈으로 설무한의 등뒤를 노렸다.
"결국 당신은 정 때문에 죽는 겁니다!"
위진악의 검이 설무한의 등을 향해 쏘아져 내려왔다.
설무한은 소여진을 바라보며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시야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검끝이 옷자락을 뚫고 살갗에 닿는 순간이었다.
허공에서 거대한 기운이 내리눌리며 위진악의 검을 튕겨냈다.
동시에 수십 명의 흑의인들이 그림자처럼 나타나 설무한을 감쌌다.
그들의 가슴에는 붉은 달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혈영교의 결사대였다.
가장 앞에 선 여인이 설무한을 부축하며 위진악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우리 교주님의 귀한 손님께 손을 대다니, 간이 부었구나."
여인의 말에 위진악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설무한은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서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려 애썼다.
그녀는 설무한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당신을 배신한 것은 세상이지, 우리가 아니에요."
설무한은 그 말을 끝으로 정신을 잃었다.
흑암절벽 위로 붉은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위진악은 자신의 목을 옥죄는 거대한 기운에 숨을 헐떡이며 바닥을 기었다.
소여진은 절벽 위에서 그 광경을 보며 비명을 질렀다.
정무맹의 고수들은 혈영교의 등장에 당황하여 전투 태세를 갖췄다.
그러나 혈영교의 무인들은 이미 설무한을 데리고 어둠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절벽에는 오직 위진악의 비참한 울음소리만이 남았다.
낙양의 전장에서는 설무한의 모든 자산이 동결되었다는 통보가 내려졌다.
강호의 역사는 다시 한번 승자의 기록으로 채워질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어둠 속으로 사라진 설무한의 심장은 여전히 차갑게 뛰고 있었다.
그것은 복수의 시작도,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저 살아남은 자의 지독한 숨결일 뿐이었다.
위진악은 피 묻은 손으로 옥비녀 조각을 움켜쥐었다.
"반드시…… 내 손으로 다시 죽여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