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패의 광휘가 설무한의 눈을 찔렀다.
칠흑 같은 어둠을 찢고 나타난 빛은 잔인할 만큼 선명했다.
흑암절벽의 자욱한 안개가 그 기세에 밀려 사방으로 흩어졌다.
전령이 치켜든 금패에는 정무맹의 권위가 서슬 퍼렇게 서려 있었다.
설무한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 빛의 근원을 응시했다.
말을 타고 나타난 전령의 뒤로 수백 명의 무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이 뿜어내는 살기가 절벽의 공기를 차갑게 얼렸다.
전령이 품 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들며 일갈했다.
청운검문 수석제자 설무한은 들으라.
목소리가 내공을 타고 절벽 전체에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너는 문파의 자산을 횡령하고 사형제들을 배신했다.
또한 정무맹의 금제를 어기고 마도의 힘을 빌려 강호를 어지럽혔다.
이에 정무맹은 너를 강호의 공적으로 규정한다.
죄인은 즉각 검을 버리고 포박을 받으라.
거부할 시 현장에서 즉결 처분에 처할 것을 명한다.
전령의 말이 끝나자마자 수백 자루의 검이 일제히 뽑혔다.
서늘한 검명(劍鳴)이 파도처럼 밀려와 설무한의 고막을 때렸다.
설무한은 대답 대신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단전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한기가 혈맥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한빙주의 냉기가 파괴된 혈관을 억지로 이어붙이고 있었다.
그것은 얼음 송곳이 살을 뚫고 지나가는 것 같은 지독한 통증이었다.
설무한은 이를 악물며 그 고통을 가슴속으로 삼켰다.
위진악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시선은 설무한과 전령 사이를 위태롭게 오갔다.
방금 전까지 그는 모든 진실을 털어놓으려 했다.
자신이 저지른 조작과 배신, 그리고 스승을 벼랑 끝으로 몬 계략까지.
그러나 전령의 등장은 그 모든 시도를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위진악의 소매 안에서 손가락이 경련하듯 떨렸다.
그는 자신의 떨림을 감추기 위해 소매를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
정무맹이 이토록 빠르게 움직일 줄은 몰랐다.
아니, 이것은 단순한 체포령이 아니었다.
진실이 입 밖으로 나오기 전에 입을 막으려는 거대한 움직임이었다.
정무맹이라는 거대한 수레바퀴가 설무한을 짓이기려 하고 있었다.
설무한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전령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전령이 쥐고 있는 금패의 중앙에 멈췄다.
눈동자가 미세하게 수축하며 푸른 빛을 발했다.
금패의 가장자리에 새겨진 기괴한 문양.
세 개의 칼자국과 그 위를 덮은 붉은 태양의 형상.
기억의 저편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십 년 전, 자신의 가문을 잿더미로 만들었던 습격자들.
부모님의 숨통을 끊어놓았던 그들의 가슴팍에 새겨져 있던 표식이었다.
그것이 왜 정무맹의 금패에 새겨져 있는가.
목 안쪽이 뜨겁게 달아오르며 비릿한 피 냄새가 올라왔다.
설무한은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듯 허공을 가볍게 쳤다.
청운검문의 수련 구령에 맞춘 일정한 박자였다.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이 싸워온 것은 일개 제자의 배신이 아니었다.
이 강호의 질서를 지탱한다는 거대 권력 자체가 적이었다.
정의를 집행한다는 금패가 고작 진실을 가리는 가리개였단 말이냐.
설무한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전령의 기세를 압도했다.
전령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네놈이 감히 정무맹의 권위에 도전하려 드는구나.
전령이 손을 들어 올리자 궁수들이 일제히 시위를 당겼다.
화살촉들이 달빛을 받아 서늘한 빛을 내뿜었다.
설무한은 등 뒤의 깎아지른 절벽을 느꼈다.
물러날 곳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번에도 피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그의 몸 주위로 푸른 안개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단전에 머물던 한빙주의 진기가 폭발적으로 팽창했다.
심장이 한 번 요동칠 때마다 주변의 풀잎들이 하얗게 얼어붙었다.
공기 중의 수분이 결정이 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설무한의 눈동자는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닌 푸른 광채로 가득 찼다.
위진악은 그 모습을 보며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알던 스승의 무공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절대적인 냉기였다.
전령이 소리쳤다.
쏴라!
수백 대의 화살이 밤하늘을 가르며 설무한을 향해 쏟아졌다.
파아앙!
설무한이 바닥을 박차고 솟구쳤다.
그가 서 있던 자리가 얼음 파편과 함께 폭발했다.
화살들은 공중에서 얼어붙어 힘없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설무한의 신형은 한 마리 청룡처럼 매끄럽게 허공을 갈랐다.
그의 목표는 화살을 쏘는 궁수들도, 자신을 포위한 무인들도 아니었다.
말 위에 오만하게 앉아 있는 전령이었다.
전령은 당황하여 허리춤의 검을 뽑으려 했다.
그러나 설무한의 속도가 더 빨랐다.
그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한빙진기가 전령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말이 비명을 지르며 앞발을 높이 쳐들었다.
차가운 냉기가 전령의 안면을 강타했다.
전령의 수염과 눈썹에 순식간에 서리가 내려앉았다.
설무한은 허공에서 몸을 뒤틀며 정권을 내질렀다.
그것은 청운검문의 기본권법인 청운권이었다.
가장 단순한 초식이었으나, 그 안에 담긴 위력은 파멸적이었다.
주변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지며 산맥의 안개가 얼어붙었다.
전령의 눈에 공포가 서렸다.
그는 급히 금패를 방패 삼아 앞을 막아섰다.
쨍그랑!
금패와 설무한의 주먹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대신 모든 것을 얼려버리는 고요한 파동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전령의 팔이 서서히 하얗게 변해갔다.
혈관 속의 피조차 얼음으로 변하는 극독과도 같은 냉기였다.
설무한의 시선은 오직 전령의 가슴에 박힌 그 문양만을 쫓았다.
진실을 말해라.
그의 목소리가 전령의 고막 안쪽에서 얼음처럼 부서졌다.
십 년 전의 그날, 너희는 무엇을 했느냐.
전령은 대답 대신 입을 벌려 비명을 지르려 했다.
하지만 얼어붙은 성대는 소리를 내보내지 못했다.
설무한의 손가락이 전령의 목덜미를 낚아채려는 찰나였다.
등 뒤에서 날카로운 검기가 쇄도했다.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었으나 검 끝이 설무한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뜨거운 선혈이 튀어 오르기도 전에 공중에서 얼어붙었다.
설무한은 신형을 뒤로 날려 착지했다.
발아래의 바위가 그의 무게와 냉기를 이기지 못하고 거미줄처럼 갈라졌다.
그의 앞을 가로막은 자는 다른 누구도 아니었다.
위진악이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검을 꽉 쥐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소용돌이쳤다.
죄책감과 욕망, 그리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공포.
하지만 그의 검 끝은 정확히 설무한의 심장을 겨누고 있었다.
위진악의 소매 안쪽에서 다시 한번 경련이 일었다.
그는 입술을 깨물며 억지로 평정심을 가장했다.
그만하십시오, 사부님.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이미 대세는 기울었습니다.
정무맹의 명을 거역하는 것은 강호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일입니다.
설무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어깨의 상처를 손으로 지그시 눌렀다.
냉기가 상처를 덮으며 지혈을 도왔지만, 마음속의 구멍은 메워지지 않았다.
자신이 가르친 검이었다.
자신이 먹이고 입히며 키워낸 제자였다.
그 제자가 이제는 권력의 파수꾼이 되어 자신의 목을 노리고 있었다.
설무한은 천천히 자세를 낮췄다.
그의 주변으로 흩날리던 눈발이 더욱 거세졌다.
바람이 비명을 지르며 절벽을 휘감았다.
정무맹의 무인들이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왔다.
그들의 발소리가 눈 위에서 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전령은 말에서 떨어져 바닥을 기며 뒤로 물러났다.
그의 팔은 이미 감각을 잃은 듯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죽여라! 당장 저 마두를 죽여라!
전령의 악에 받친 명령이 떨어졌다.
위진악은 검을 고쳐 잡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검신에 푸른 안개가 서렸다.
설무한이 가르쳐주지 않은, 정무맹의 기운이 섞인 낯선 검기였다.
배신은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설무한은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이제 슬픔도, 분노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만년설산의 만년빙처럼 차가운 이성만이 번득였다.
그는 자신의 가슴속에 박힌 한빙주를 향해 의식을 집중했다.
심장이 터질 듯한 박동을 내보내며 냉기를 갈구했다.
전신의 혈맥이 비명을 지르며 뒤틀렸다.
파괴된 단전에서 시작된 고통이 뇌를 찔렀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 고통을 연료 삼아 진기를 끌어올렸다.
그의 발아래에서부터 거대한 얼음 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빙화(氷花)의 꽃잎이 하나씩 펼쳐질 때마다 주변의 무인들이 뒷걸음질 쳤다.
그것은 무공의 경지를 넘어선, 재앙에 가까운 광경이었다.
위진악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그것은 청운검문의 비전인 청운만리검이었다.
빠르고 정교하며,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검초였다.
설무한은 그 검의 궤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검을 피하는 대신 손가락을 튕겨 검신을 튕겨냈다.
챙!
금속음이 고요한 절벽에 파장을 일으켰다.
위진악의 손목이 꺾이며 검이 뒤로 밀려났다.
그 빈틈을 놓치지 않고 설무한의 신형이 쇄도했다.
그의 손바닥이 위진악의 가슴을 향해 뻗어 나갔다.
냉기가 소용돌이치며 위진악의 의복을 하얗게 얼렸다.
위진악은 눈을 부릅뜨며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이미 설무한의 손길은 그의 심장 근처에 도달해 있었다.
그 순간, 위진악의 품 안에서 작은 물체가 떨어졌다.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나는 옥비녀 조각이었다.
설무한의 손길이 찰나의 순간 멈칫했다.
그것은 십 년 전, 위진악이 정식 제자가 되던 날 설무한이 직접 깎아 선물한 것이었다.
제자의 길을 잃지 말라는 뜻을 담았던 옥이었다.
그 찰나의 머뭇거림을 위진악은 놓치지 않았다.
그는 바닥을 구르며 설무한의 하복부를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서늘한 감각이 복부를 훑고 지나갔다.
설무한은 신형을 뒤로 날려 거리를 벌렸다.
옷자락이 찢어지고 붉은 선혈이 바닥에 점을 찍었다.
위진악은 바닥에 떨어진 옥비녀 조각을 보지 않으려는 듯 시선을 돌렸다.
그의 검 끝에는 설무한의 피가 맺혀 있었다.
전령은 어느새 호위 무사들 사이로 숨어들어 비열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위진악, 잘했다! 그놈의 목을 가져오면 청운검문의 장문인 자리는 네 것이다!
전령의 목소리가 산울림이 되어 돌아왔다.
설무한은 자신의 상처를 내려다보았다.
피는 곧바로 얼어붙어 멈췄지만, 상처 깊숙한 곳에서 느껴지는 진동은 멈추지 않았다.
한빙주가 미친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그것은 주인을 지키려는 본능인가, 아니면 모든 것을 파괴하려는 욕망인가.
설무한은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눈앞의 제자와, 그 뒤의 전령, 그리고 산 아래를 가득 메운 무인들.
이들은 모두 진실을 묻기 위해 이곳에 모였다.
그렇다면 자신도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설무한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하얗게 변해갔다.
살아 있는 인간의 생기를 모두 냉기로 바꾼 대가였다.
그의 주변 삼십 장 이내의 모든 것이 얼음 조각으로 변해 바스러졌다.
위진악은 본능적으로 검을 앞세워 방어 태세를 취했다.
하지만 그가 본 것은 설무한의 공격이 아니었다.
설무한은 절벽 아래의 안개를 향해 몸을 던졌다.
추락이 아니었다.
그는 안개를 밟으며 허공을 걷고 있었다.
빙공(氷功)이 극의에 달해 공기 중의 수분을 발판 삼는 경지였다.
전령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저놈을 잡아라! 놓치지 마라!
무인들이 절벽 끝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들이 마주한 것은 거대한 얼음 장벽이었다.
설무한이 지나간 자리에 세워진 수십 장 높이의 빙벽이 그들의 접근을 막았다.
위진악은 멍하니 그 빙벽을 바라보았다.
검을 쥔 손이 멈추지 않고 떨렸다.
그는 알고 있었다.
오늘 설무한을 죽이지 못한 대가가 무엇인지.
정무맹의 비밀을 알게 된 스승은 이제 더 이상 도망자가 아니었다.
그는 이 썩어빠진 강호를 무너뜨릴 거대한 한파가 되어 돌아올 것이다.
위진악은 바닥에 떨어진 옥비녀 조각을 흙 묻은 손으로 집어 들었다.
조각난 옥의 날카로운 단면이 그의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피가 흘러나와 옥을 적셨다.
그는 그 고통을 느끼며 설무한이 사라진 안개를 노려보았다.
전령이 다가와 위진악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챘다.
무엇 하느냐! 즉시 추격대를 편성해라!
위진악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전령을 보았다.
그의 눈에는 스승에게서 보았던 것과 닮은, 차가운 살기가 서려 있었다.
전령은 움찔하며 위진악의 손을 놓았다.
위진악은 대답 대신 검을 칼집에 꽂아 넣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설무한이 향할 곳은 단 한 군데뿐이라는 것을.
자신의 가문을 멸문시켰던 그 문양의 주인들이 있는 곳.
정무맹의 심장부인 낙양이었다.
설무한은 안개 속에서 자신의 흐려지는 의식을 붙잡았다.
한빙주의 냉기가 전신을 잠식하고 있었다.
피는 이미 차가운 얼음물이 되어 혈관을 돌고 있었다.
그는 품 안에서 소여진이 남겼던 서신을 꺼냈다.
서신은 냉기에 젖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는 서신의 내용을 이미 외우고 있었다.
낙양의 전장에 보관된 금괴들, 그리고 그 밑에 숨겨진 진짜 장부.
그것이 이 모든 조작을 뒤집을 유일한 열쇠였다.
설무한은 멀리 보이는 낙양의 불빛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그의 눈동자가 다시 한번 짙은 푸른 빛으로 번쩍였다.
심장 속의 한빙주가 기괴한 박동을 내뱉었다.
그것은 사람이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수천 년을 갇혀 있던 영물이 깨어나며 내뱉는 울부짖음 같았다.
설무한은 자신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느꼈다.
피가 거꾸로 솟는 고통 대신, 기묘한 고요함이 그를 감쌌다.
그는 더 이상 청운검문의 설무한이 아니었다.
배신당한 사부도, 억울한 누명을 쓴 죄인도 아니었다.
그는 오직 진실을 얼려버리는 겨울 그 자체가 되어가고 있었다.
발아래의 숲이 그의 기운에 닿아 하얗게 질려갔다.
낙양의 성문이 가까워질수록 그의 냉기는 더욱 서슬 퍼렇게 날을 세웠다.
낙양 전장의 거대한 철문 앞에 선 설무한은 손을 뻗었다.
문지기들이 소리치며 달려왔지만, 그들의 무기는 문에 닿기도 전에 바스러졌다.
설무한의 손가락이 철문에 닿는 순간, 거대한 진동과 함께 문이 얼음 조각이 되어 무너져 내렸다.
그는 무너진 문틈 사이로 당당히 걸어 들어갔다.
그곳에는 이미 그를 기다리는 그림자들이 가득했다.
금패를 든 정무맹의 고수들이 어둠 속에서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설무한은 그들을 보며 헛기침을 했다.
그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길게 뿜어져 나왔다.
그는 품 안에서 굳어버린 서신을 꺼내 바닥에 던졌다.
장부를 내놔라.
그의 말 한마디에 전장의 넓은 마당 전체가 순식간에 얼음판으로 변했다.
고수들이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지만, 설무한의 신형은 이미 그들의 뒤를 지나치고 있었다.
그의 목표는 전장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비밀 금고였다.
그곳에는 위진악이 그토록 감추려 했던, 그리고 정무맹이 덮으려 했던 진실이 잠들어 있었다.
설무한은 금고의 두꺼운 철판 위로 손바닥을 갖다 댔다.
한빙주의 진기가 철판의 분자 구조를 얼려 파괴하기 시작했다.
쿠르르릉.
거대한 굉음과 함께 금고의 문이 뒤틀리며 열렸다.
그 안에는 금괴 대신 수천 장의 서신과 낡은 장부들이 쌓여 있었다.
설무한은 그중에서 가장 낡은 장부 하나를 집어 들었다.
장부의 첫 장에는 십 년 전의 날짜와 함께 자신의 가문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의 손끝이 장부의 표지를 쓸어내렸다.
그때였다.
뒤쪽에서 익숙한 기척이 느껴졌다.
설무한은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장부를 품에 넣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
어둠 속에서 소여진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녀의 손에는 날카로운 비수가 들려 있었다.
그녀의 눈은 눈물로 젖어 있었지만, 비수를 쥔 손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사부님, 제발 그 장부를 저에게 주십시오.
그녀의 목소리가 떨리며 전장의 고요를 깼다.
그렇지 않으면 사부님은 오늘 이곳을 나가지 못합니다.
설무한은 천천히 뒤를 돌아 소여진을 보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 소여진의 일그러진 얼굴이 비쳤다.
너 또한 그들과 한패였더냐.
소여진은 대답 대신 비수를 가슴 높이로 들어 올렸다.
그녀의 뒤로 수십 명의 복면인이 소리 없이 나타나 설무한을 포위했다.
그들의 가슴팍에는 금패에서 보았던 그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설무한은 헛웃음을 삼켰다.
그는 자신의 심장을 옥죄는 냉기를 억누르며 소여진에게 다가갔다.
소여진은 뒷걸음질 치며 비수를 휘둘렀다.
하지만 설무한은 피하지 않았다.
비수가 그의 팔을 깊숙이 베고 지나갔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소여진의 눈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의 손에서 전해지는 극심한 냉기에 소여진의 몸이 경직되었다.
너를 믿었던 내가 어리석었구나.
설무한의 목소리는 슬프지 않았다.
오직 무거운 진실만이 담겨 있었다.
그는 소여진의 손에서 비수를 빼앗아 바닥에 던졌다.
그리고 그녀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이 장부의 끝에 네 이름이 없기를 바란다.
설무한은 그대로 소여진을 지나쳐 전장의 지붕을 향해 솟구쳤다.
복면인들이 일제히 무기를 던지며 그를 저지하려 했다.
하지만 설무한의 신형은 이미 낙양의 밤하늘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소여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설무한이 남긴 핏자국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에는 설무한이 건넨 작은 종이 조각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그곳에는 십 년 전, 그녀가 설무한에게 보냈던 감사 편지의 일부가 적혀 있었다.
소여진은 종이를 움켜쥐며 비명을 지르듯 울음을 터뜨렸다.
낙양 성벽 위에 선 설무한은 피 묻은 장부를 펼쳤다.
장부의 마지막 장에는 예상치 못한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것은 위진악도, 소여진도 아니었다.
이미 십 년 전에 죽었다고 믿었던 자신의 사부, 청운검문의 전대 장문인의 이름이었다.
설무한의 손가락이 그 이름을 누르듯 강하게 떨렸다.
장부의 종이가 냉기를 견디지 못하고 바스라졌다.
진실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추악하고 깊은 곳에 뿌리박혀 있었다.
그는 장부를 품 안 깊숙이 갈무리했다.
이제 가야 할 곳은 정해졌다.
모든 배신의 시작점이자, 자신의 무공이 태어난 곳.
청운검문의 본산인 청운봉이었다.
설무한은 성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그의 뒤로 낙양의 밤하늘이 푸른 서리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다가올 거대한 폭풍의 예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