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운봉의 새벽 공기는 면도날처럼 날카로웠다.
폐부 깊숙이 스미는 냉기는 비강을 타고 내려가 전신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설무한은 눈앞에 선 위진악의 검 끝을 응시했다.
검신에 비친 자신의 눈동자가 유난히 시리고 푸르렀다.
위진악의 발이 지면을 박찼다.
푸른 검기가 허공을 가르며 설무한의 목줄기를 향해 쇄도했다.
그 궤적은 망설임이 없었고, 위력은 산조차 벨 듯이 위압적이었다.
설무한은 단전에 남은 마지막 한 조각 진기를 끌어올렸다.
그때 숲 사이로 붉은 옷을 입은 그림자가 튀어 올랐다.
정무맹의 금패를 가슴에 단 전령이 소리쳤다.
그의 손에는 설무한을 구속하라는 집행령이 들려 있었다.
위진악의 검 끝이 허공에서 기괴하게 휘어졌다.
파각!
검은 설무한의 목이 아닌 전령의 심장을 정확히 꿰뚫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전령의 입에서 검붉은 선혈이 쏟아졌다.
설무한의 뺨에 뜨거운 핏방울이 튀었다.
비릿한 철분 냄새가 차가운 공기 속으로 번져나갔다.
위진악은 검을 거두지 않은 채 전령의 시신을 걷어찼다.
그의 손가락이 소매 속에서 미세하게 경련하고 있었다.
위진악의 시선이 설무한의 발치에 떨어진 낡은 옥비녀에 머물렀다.
그것은 십 년 전 설무한이 그에게 건넸던 유일한 징표였다.
이게 무슨 짓이냐.
설무한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위진악은 대답 대신 품 안에서 두툼한 종이 뭉치를 꺼내 던졌다.
바람을 타고 날아온 종이는 낙양 전장의 어음이었다.
동결된 계좌를 풀 수 있는 유일한 열쇠였다.
그 위조된 장부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위진악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어깨 뒤편, 어둠이 짙게 깔린 숲을 응시했다.
살기가 느껴졌다.
한두 명이 아니었다.
최소한 수십 명의 고수가 숨죽인 채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대장로 위철심의 직속 정예병인 흑영대였다.
위진악은 옥비녀를 움켜쥐며 이를 악물었다.
스승님, 이번 한 번만 저를 다시 믿어달라 하지 않겠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뼈를 깎는 듯한 절박함이 묻어났다.
그저 살아남으십시오.
위진악이 검을 고쳐 쥐며 전방을 향해 섰다.
숲속에서 검은 복면을 쓴 무인들이 비우(飛雨)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들의 검끝은 설무한의 단전을 겨누고 있었다.
위진악이 먼저 몸을 날려 흑영대의 선두를 가로막았다.
강렬한 파공음과 함께 금속의 마찰음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설무한은 단전 속 한빙주의 진동을 느꼈다.
파괴된 혈맥 사이로 차가운 냉기가 실핏줄처럼 퍼져나갔다.
통증은 이미 감각을 넘어선 지 오래였다.
그는 비틀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흑암절벽의 끝으로 향했다.
뒤를 돌아보자 위진악의 등 뒤로 수많은 칼날이 들이닥치고 있었다.
제자의 배신은 또 다른 배신을 낳고, 그 끝에는 붉은 피만이 남았다.
위진악의 어깨에 깊은 자상이 생기며 선혈이 뿜어졌다.
그는 비명을 지르는 대신 검을 휘둘러 적의 목을 베어 넘겼다.
그의 눈은 오직 설무한의 탈출로만을 확보하고 있었다.
설무한은 주머니 속에 든 어음을 꽉 쥐었다.
이것이 단순한 종이가 아님을 그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낙양 전장의 거대한 자금줄이 이 종이 한 장에 달려 있었다.
자신을 파멸로 몰아넣었던 그 자산이 이제는 재기의 발판이 되었다.
벼랑 끝에 선 설무한의 발아래로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이 펼쳐졌다.
안개가 자욱한 절벽 아래는 죽음의 냄새로 가득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단전에서 소용돌이치는 한빙주의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솟구쳤다.
전신의 뼈마디가 어긋나는 듯한 충격이 전해졌다.
설무한은 눈을 감고 몸을 허공으로 던졌다.
떨어지는 몸 위로 차가운 바람이 휘감겼다.
중력에 끌려가는 육신과는 달리 그의 내공은 하늘을 향해 뻗었다.
한빙진기가 등 뒤에서 투명한 날개처럼 펼쳐졌다.
공기 중의 수분이 순식간에 얼어붙으며 단단한 기류를 형성했다.
추락은 어느새 우아한 활공으로 변해 있었다.
절벽 위에서 그를 쫓던 흑영대원들의 고함이 점점 멀어졌다.
위진악이 마지막으로 내뱉은 거친 숨소리만이 귓가에 맴돌았다.
설무한은 냉기를 조절하며 안개 속을 가로질렀다.
부서진 혈맥이 얼어붙으며 기묘한 힘의 통로를 만들어냈다.
이것은 청운검문의 무공이 아니었다.
한빙주라는 영물이 선사한, 오직 그만이 도달할 수 있는 미지의 경지였다.
멀리 낙양의 등불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설무한은 공중에서 몸을 비틀어 하강 속도를 조절했다.
강바람이 뺨을 스치며 지나갔다.
그는 강가에 위치한 낡은 나루터 근처에 가볍게 내려앉았다.
발끝이 지면에 닿는 순간 푸른 서리가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설무한은 품 안에서 위진악이 준 어음을 꺼내 보았다.
종이 뒷면에는 작은 글씨로 전장의 비밀 암호가 적혀 있었다.
그것은 낙양의 모든 금고를 열 수 있는 마법의 주문과도 같았다.
그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어렸다.
설무한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어둠이 짙게 깔린 낙양 시내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객잔의 등불이 하나둘 꺼져가는 시간이었다.
설무한은 삿갓을 깊게 눌러쓰고 전장 뒷골목의 비밀 문 앞에 섰다.
문 옆에 새겨진 작은 검의 문양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위진악이 가르쳐준 대로 어음의 모서리를 문양에 맞추어 끼워 넣었다.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육중한 철문이 천천히 열렸다.
지하로 이어지는 계단 끝에서 촛불을 든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노인은 어음을 확인하더니 설무한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이 계좌를 풀기 위해서는 피의 대가가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나.
노인의 목소리는 쇳소리가 섞인 듯 탁했다.
설무한은 대답 대신 자신의 손목을 그어 붉은 피를 어음 위에 흘렸다.
피가 스며들자 어음에 숨겨져 있던 금색 실선들이 살아 움직였다.
금고 문이 열리며 십 년간 잠들어 있던 청운검문의 비자금이 모습을 드러냈다.
금괴와 영석, 그리고 각종 비급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설무한은 그중 가장 깊숙한 곳에 보관된 작은 상자를 집어 들었다.
상자 안에는 자신의 사부가 남긴 친필 서신이 들어 있었다.
서신을 읽어 내려가던 설무한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떨렸다.
거기에는 위진악조차 알지 못했던 배신의 진짜 주모자가 적혀 있었다.
그는 서신을 가슴에 품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새벽녘의 낙양은 폭풍전야처럼 고요했다.
설무한은 멀리 청운봉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이제 빚을 갚아줄 시간이었다.
그는 손을 뻗어 허공에 서린 냉기를 움켜쥐었다.
나루터 근처에서 한 사내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위진악이었다.
그는 흑영대의 추격을 뿌리치고 간신히 이곳까지 기어온 듯했다.
그의 가슴에는 대장로 위철심의 독문 무공인 흑살장의 흔적이 선명했다.
위진악은 흐릿해지는 시야 속에서 설무한의 뒷모습을 찾았다.
하지만 그곳에는 오직 차가운 강바람과 흩어지는 안개뿐이었다.
그가 바닥에 떨어진 옥비녀를 잡으려 손을 뻗었다.
툭.
누군가의 장화가 그의 손을 짓밟았다.
위진악이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복면을 쓴 사내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내의 손에는 정무맹의 상징인 황금 사자가 새겨진 검이 들려 있었다.
수고했다, 위 소문주.
사내의 목소리는 소름 끼칠 정도로 평온했다.
덕분에 설무한의 은신처와 전장의 열쇠를 모두 손에 넣게 되었군.
위진악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는 자신의 심장을 관통하는 검신의 차가운 감촉을 느끼며 의식을 잃어갔다.
설무한은 낙양 전장의 비밀 통로를 빠져나와 번화가로 향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의 푸른 눈동자에 머물렀다 사라졌다.
그는 시장통 구석에 위치한 허름한 대장간 앞에 멈춰 섰다.
풀무질 소리가 멈추고 땀에 젖은 대장장이가 밖으로 나왔다.
그는 설무한의 삿갓 아래 얼굴을 확인하더니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준비는 끝났습니까.
설무한의 물음에 대장장이가 안쪽에서 거대한 상자를 내왔다.
상자 안에는 만년한철로 제련된 거대한 대검이 빛나고 있었다.
검신에서는 끊임없이 하얀 김이 피어올랐다.
설무한은 검자루를 잡았다.
단전의 한빙진기가 검신으로 흘러 들어가며 눈부신 청광을 내뿜었다.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는 검을 등에 메고 다시 길을 나섰다.
목표는 낙양 전장이 아니었다.
정무맹의 지부가 위치한 낙양 성주부였다.
그곳에는 자신을 파렴치한으로 몰아넣은 진짜 흑막이 기다리고 있었다.
설무한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바닥이 얼어붙어 하얗게 갈라졌다.
성주부의 거대한 정문 앞에 도달한 그는 검을 뽑아 들었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검기가 성문을 향해 작렬했다.
콰아앙!
부서진 문 사이로 수백 명의 갑주 무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설무한은 그들을 향해 차갑게 일갈했다.
청운검문의 설무한이 돌아왔다고 전하라.
성주부 깊숙한 곳에서 한 남자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의 옷소매에는 정무맹의 금패가 아닌, 혈영교의 상징이 은밀히 새겨져 있었다.
남자는 부서진 문 쪽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를 들으며 미소 지었다.
드디어 한빙주의 주인이 제 발로 걸어 들어왔군.
그는 옆에 놓인 검은 호리병을 들어 바닥에 피를 뿌렸다.
주변의 그림자들이 살아 움직이며 설무한을 향해 소리 없이 다가갔다.
설무한은 몰려드는 적들을 베어 넘기며 전진했다.
그의 검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얼음 조각들이 꽃잎처럼 흩날렸다.
적들의 피는 바닥에 닿기도 전에 얼어붙어 붉은 수정이 되었다.
그의 눈앞에 거대한 전각이 나타났다.
전각의 현판에는 '만가전'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설무한은 전각의 문을 박차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죽었다고 믿었던 전대 장문인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앉아 있었다.
무한아, 고생 많았다.
사부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설무한의 검 끝이 멈칫했다.
사부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그 손에는 가느다란 실처럼 얇은 기형인(畸形刃)이 숨겨져 있었다.
설무한은 사부의 눈동자 속에서 일렁이는 붉은 기운을 발견했다.
그것은 도저히 정파의 고수에게서 나올 수 없는 탁한 마기였다.
사부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설무한의 목소리가 떨림 없이 공기를 갈랐다.
노인은 기괴한 웃음을 터뜨리며 자신의 얼굴 가죽을 찢어냈다.
가면 뒤에서 나타난 것은 위진악과 똑같이 생긴, 하지만 훨씬 늙고 탐욕스러운 얼굴이었다.
위진악은 단지 나의 허울이었을 뿐이지.
노인이 검을 휘두르자 사방에서 검은 실들이 뿜어져 나와 설무한의 사지를 결박했다.
혈맥에 박힌 금제가 요동치며 설무한의 내공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그는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피를 토해냈다.
노인은 설무한의 목에 칼을 들이대며 속삭였다.
이제 네 몸속에 든 한빙주를 내놓을 시간이다.
설무한은 고개를 들어 노인을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가 이전보다 더 짙은 푸른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단전 깊은 곳에서 한빙주가 박살 나며 숨겨져 있던 진정한 힘이 해방되었다.
그것은 내공이 아니라, 얼어붙은 시간의 조각들이었다.
설무한의 몸을 묶고 있던 검은 실들이 유리처럼 부서져 내렸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노인의 목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네놈이 누구든 상관없다.
설무한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극저온의 냉기가 노인의 혈관을 얼려버렸다.
노인의 몸이 하얗게 서리가 앉으며 굳어갔다.
설무한은 노인의 가슴을 향해 대검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얼어붙은 육신이 산산조각 나며 사방으로 튀었다.
그는 부서진 잔해 속에서 빛나는 작은 옥인을 발견했다.
그것은 위진악이 그토록 찾으려 했던 청운검문의 진짜 장문인 직인이었다.
설무한은 옥인을 챙겨 전각 밖으로 걸어 나갔다.
성주부 밖에는 여전히 수많은 적이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그는 하늘을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오늘부로 청운검문은 강호에서 사라진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거대한 얼음 기둥들이 성주부 사방에서 솟구쳐 올랐다.
성 전체가 거대한 빙산으로 변하며 침묵에 잠겼다.
설무한은 얼어붙은 성벽 위를 걸어 유유히 사라졌다.
그의 뒤로 부서지는 얼음 소리만이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강가에 도착한 설무한은 위진악이 쓰러져 있던 자리를 살폈다.
그곳에는 오직 차가운 핏자국과 부러진 옥비녀의 조각만이 남아 있었다.
그는 옥비녀 조각을 주워 품 안에 넣었다.
멀리서 수많은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정무맹의 본대와 혈영교의 연합군이 낙양을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설무한은 강물 위로 발을 내디뎠다.
강물이 닿는 곳마다 단단한 얼음길이 만들어졌다.
그는 강 한복판에서 멈춰 서서 다가오는 대군을 마주 보았다.
검을 쥔 그의 손에 푸른 진기가 감돌았다.
오너라, 강호의 모든 위선자들아.
설무한은 다가오는 적들을 향해 검을 비스듬히 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