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라스무스의 뒷모습이 흐릿한 촛불 아래에서 일렁였다. 좁고 가파른 계단을 내려갈수록 공기는 점점 차갑고 눅눅해졌다. 벽면을 타고 흐르는 습기가 장화 끝에 닿아 기분 나쁜 감각을 전했다. 레온하르트는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을 주며 앞서가는 노법사를 응시했다. 그의 걸음걸이는 평소보다 무거웠고 어깨는 미세하게 굽어 있었다. 아델가드의 지하 깊숙한 곳에 이런 공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법전 어디에서도 읽은 적이 없었다. 레온하르트는 안경테를 밀어 올리며 주변의 마나 농도를 가늠했다. 억제된 마력이 피부를 따끔거리게 찔러왔다.
에라스무스가 멈춰 선 곳은 막다른 벽이었다. 그는 콧수염을 몇 번 비틀더니 벽돌 하나를 깊숙이 밀어 넣었다. 육중한 돌문이 비명을 지르며 옆으로 밀려났다. 그 안에는 수천 권의 서적이 천장까지 빽빽하게 들어찬 서고가 있었다. 서가 사이사이에 낀 먼지들이 빛을 받아 부유했다. 곰팡내와 오래된 종이 냄새가 코끝을 찔러와 레온하르트는 소매로 코를 가렸다. 에라스무스는 서고 구석의 작은 탁자로 다가가더니 떨리는 손으로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가죽 표지가 다 갈라진 낡은 일기장이었다. 표지 중앙에는 황금색 실로 수놓인 아스텔 가문의 문장이 박혀 있었다. 하지만 문장 위로는 붉은색 잉크로 거칠게 쓴 글귀가 덧씌워져 있었다. 죄악의 기록. 레온하르트의 눈동자가 그 글자를 보는 순간 가늘게 떨렸다. 그것은 분명 아버지의 필체였다. 어린 시절 서재에서 보았던 정갈하면서도 날카로운 그 글씨가 틀림없었다.
에라스무스가 일기장을 레온하르트에게 내밀었다. 책장 사이로 마른 곰팡이 가루가 떨어져 바닥에 흩어졌다. 레온하르트는 장갑을 낀 손으로 조심스럽게 책을 받아 들었다. 표지의 가죽은 차가웠고 불길한 냉기가 손바닥을 타고 심장까지 전달되는 기분이었다. 첫 장을 넘기자마자 나타난 것은 500년 전 평화 조약의 초안이었다. 그런데 그 내용이 그가 알고 있던 법전의 조항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조약의 목적은 공존이 아니었다. 레온하르트의 시선이 조밀하게 적힌 룬 문자들 사이를 빠르게 훑었다. 문장 하나하나가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가슴을 파고들었다. 인간을 드래곤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조항들은 사실 거대한 마나 억제 회로의 부품에 불과했다. 아버지는 조약이라는 형식을 빌려 대륙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마법 진으로 구성해 두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아스텔 가문의 혈통만이 다룰 수 있는 제어 장치가 설계되어 있었다.
레온하르트의 목 안쪽이 뜨거워지며 타액이 말라붙었다. 그가 평생을 바쳐 수호하려 했던 정의의 근간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조약문에 명시된 마법 제한법은 드래곤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대륙의 마나를 특정 지점으로 모으기 위한 깔때기였다. 인간들이 마법을 쓰지 못하게 억압할수록 남은 마나는 아스텔 가문이 관리하는 시간의 탑으로 흘러 들어갔다. 철저하게 계산된 마나의 독점이었고 법의 이름을 빌린 합법적인 수탈이었다.
에라스무스가 낮게 읊조렸다. 아버지는 법을 만든 게 아니야. 그는 탁자 위에 놓인 촛불을 멍하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법의 탈을 쓴 거대한 감옥을 설계한 거지. 레온하르트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일기장 다음 장에는 아버지가 조약을 체결하며 느꼈던 희열과 공포가 뒤섞인 문장들이 가득했다. 용들을 멸절시키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그들을 법이라는 틀 안에 가두고 인간의 마나를 제물로 삼아 영원히 잠들게 하려 했다는 기록이었다.
이것이 우리가 누려온 평화의 대가였나. 레온하르트는 마음속으로 자문했다. 그가 카엘을 비난하며 들이댔던 법 조항들이 사실은 인간의 진보를 가로막는 쇠창살이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아버지는 영웅이 아니라 대륙의 모든 가능성을 거세한 간수였다. 레온하르트가 고수해온 논리와 법리는 순식간에 기만으로 변질되었다. 시야가 흐릿해지며 안경 너머의 세계가 일그러졌다.
에라스무스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다 멈칫하며 거두었다. 자네 아버지는 조약이 파기될 경우를 대비해 자네를 준비시킨 걸세. 레온하르트는 그 말을 듣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버지는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아들을 사냥개로 키운 셈이었다. 법을 수호한다는 자부심으로 가득 찼던 가슴속에 차가운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 그는 일기장을 덮고는 차가운 서고의 벽에 등을 기댔다.
공간 왜곡이 일어나는 듯 서고의 책장들이 기괴하게 뒤틀려 보였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오른팔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4화에서 새겨진 고대 룬 문자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드래곤을 억제하는 권능인 줄 알았으나 사실은 아버지가 설계한 감옥의 열쇠였다. 피부 위로 각인된 문자들이 마치 살아있는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갑자기 팔뚝에서 극심한 통증이 치솟았다. 레온하르트는 비명을 참으며 팔을 움켜쥐었다. 룬 문자들이 칠흑 같은 검은색으로 변하며 주변의 살을 태우기 시작했다. 고열이 혈관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에라스무스가 당황하며 뒤로 물러났다. 레온하르트의 코에서 진득한 핏방울이 떨어져 일기장 위를 적셨다. 아티팩트가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공명하며 주변의 마나를 강제로 빨아들이고 있었다.
숨이 막혀왔다. 기도는 좁아졌고 폐부에는 뜨거운 연기가 가득 찬 것 같았다. 레온하르트는 바닥을 뒹굴며 고통에 몸부림쳤다. 아티팩트의 푸른 빛은 이제 죽음의 빛깔인 보라색으로 변해 있었다. 그것은 사용자의 생명력을 연료로 삼아 작동하는 최후의 제어 장치였다. 아버지는 진실을 깨닫는 자가 나타나면 그 입을 막기 위해 이 장치를 심어둔 것이 분명했다.
레온하르트의 눈앞에 불꽃이 튀더니 이내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게 요동치다 어느 순간 멎는 듯한 충격이 전해졌다. 아티팩트의 가느다란 사슬들이 피부를 뚫고 들어가 심장을 직접 압박해왔다. 그는 손을 뻗어 에라스무스의 옷자락을 잡으려 했으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에라스무스의 경악한 얼굴이 멀어지며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정막이 찾아왔다.
기계적인 금속음이 머릿속을 울렸다. 그것은 조약의 파기를 감지한 시스템의 경고음이었다. 레온하르트의 의식은 점점 심연 속으로 가라앉았다. 팔에 새겨진 룬 문자는 이제 뼈를 깎아내는 듯한 진동을 일으키며 검은 연기를 내뿜었다. 그의 심장 박동이 한 번, 그리고 아주 길게 멈췄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가슴 위에 놓인 손이 차갑게 식어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에라스무스가 절규하며 그를 붙잡았다. 하지만 레온하르트의 몸은 이미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아티팩트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줄기들이 서고 전체를 뒤덮으며 고대의 금기를 노래하기 시작했다. 죽어가는 레온하르트의 입술이 미세하게 달싹였다. 그것은 법을 읊조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저주 섞인 신음이었다.
검은 빛이 서고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에라스무스의 외침도, 낡은 책들의 바스락거림도 모두 어둠 속에 묻혔다. 레온하르트의 가슴 속에서 뛰어야 할 고동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차가운 금속의 마찰음뿐이었다. 아티팩트는 주인의 생명을 제물로 삼아 대륙 어딘가에 잠들어 있던 거대한 기계 장치를 깨우고 있었다.
레온하르트의 팔에서 시작된 검은 균열이 목을 타고 얼굴까지 번졌다. 그의 피부는 이제 인간의 것이라기보다 딱딱한 비늘에 가까워 보였다.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리더니 다시 떠졌을 때, 그 안에는 이성 대신 핏빛 광기만이 서려 있었다. 그는 자신의 가슴을 쥐어짜는 아티팩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뼈가 어긋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손가락이 가슴팍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심장을 직접 멈추려는 아티팩트를 거칠게 잡아 뜯었다. 찢겨 나간 살점 사이로 푸른 마나와 붉은 피가 뒤섞여 쏟아졌다. 그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기괴한 웃음을 흘리며 에라스무스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이미 용의 것과 같은 세로 동공으로 변해 있었다. 에라스무스는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치다 서가에 부딪혀 넘어졌다.
레온하르트가 피 묻은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일기장을 집어 들었다. 그는 아버지가 남긴 기록을 단숨에 찢어버리며 짐승 같은 목소리로 포효했다. 서고의 천장이 무너지며 흙먼지가 쏟아져 내렸다. 그는 무너지는 잔해 속에서도 단 한 곳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것은 아델가드의 중심에 우뚝 솟은 시간의 탑이었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심장을 옥죄는 보랏빛 사슬을 끊어내며 계단을 향해 도약했다.
그의 뒤로 수천 권의 금서들이 불길에 휩싸여 타올랐다. 아스텔 가문의 비밀과 함께 인간의 거짓된 평화도 재가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피가 흐르는 팔을 휘둘러 막아선 돌문을 단숨에 박살 냈다. 지상의 공기가 폐부로 들어오자 그는 억눌러왔던 분노를 언령에 실어 내뱉었다. 아델가드의 밤하늘로 보랏빛 번개가 내리치며 새로운 재앙의 시작을 알렸다.
레온하르트는 성벽 끝에 서서 도심을 내려다보았다. 사람들은 아직 자신들이 어떤 감옥에서 살고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가슴에서 뜯어낸 아티팩트 조각을 으스러뜨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판결은 끝났다.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대륙 너머에서 들려오는 거대한 포효가 그의 말에 응답하듯 대지를 흔들었다.
레온하르트의 발밑에서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며 거대한 날개 모양을 형성했다. 그는 이제 법의 수호자가 아니라 법을 파괴하는 집행자가 되어 있었다. 아델가드의 종소리가 불길하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레온하르트는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의 사라진 자리에는 오직 찢긴 일기장 조각들만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에라스무스는 무너진 서고 속에서 레온하르트가 남긴 마지막 흔적을 보았다. 그것은 아티팩트가 박혀 있던 자리에서 흘러나온 검은 액체였다. 액체는 바닥에 기괴한 문자를 그리며 서서히 굳어갔다. 에라스무스는 그 문자를 해독하려다 비명을 지르며 고개를 돌렸다. 그것은 500년 전 조약의 원본에도 없던,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한 마지막 조항이었다.
레온하르트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의 심장은 멈췄지만, 아티팩트가 주입한 금기의 마나가 그를 억지로 움직이게 하고 있었다. 그는 탑의 꼭대기를 향해 한 걸음씩 내디디며 자신의 영혼이 바스러지는 소리를 들었다. 아버지가 설계한 감옥의 문이 마침내 안쪽에서부터 부서지고 있었다.
레온하르트의 손이 탑의 외벽을 잡자 차가운 석재가 비명을 지르며 녹아내렸다. 그는 자신의 팔을 태우는 고열을 즐기듯 입가에 비틀린 미소를 띠었다. 탑의 정상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영원한 파멸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심장을 멈추려 했던 그 힘을 역이용해 대륙의 근간을 뒤흔들 준비를 마쳤다.
밤하늘을 가르며 날아오른 것은 드래곤이 아니었다. 그것은 법의 탈을 벗어 던진 인간이라는 이름의 괴물이었다. 레온하르트의 외침이 아델가드 전역에 울려 퍼졌다.
모든 계약을 파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