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벽 위로 쏟아지는 바람은 비릿한 마나의 잔해를 머금고 있었다. 레온하르트 반 아스텔은 자신의 오른팔을 감싸 쥔 채 성채의 가장자리에 섰다. 각인된 룬 문자가 살점을 파고드는 고통이 전신을 훑었으나 그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감추기 위해 그는 법전의 모서리를 더듬었다. 낡은 가죽의 질감이 손바닥에 닿으며 차가운 현실을 일깨웠다.
아델가드의 하늘을 수놓던 거대한 대공 방어망이 명멸했다. 황금빛으로 빛나던 기하학적 문양들이 마나 결핍을 견디지 못하고 유리 조각처럼 부서져 내렸다. 도시의 심장이라 불리는 마나 수정구가 빛을 잃자 거리는 순식간에 정적에 잠겼다. 돌벽 사이로 스며드는 한기가 뼈마디를 시리게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 정적을 깬 것은 인간의 비명이 아니었다.
구름을 찢고 나타난 거대한 그림자들이 아델가드 시가지를 덮었다. 발락의 핏빛 비늘과는 다른, 서리 발린 은색과 탁한 청색의 비늘들이 번뜩였다. 북부의 설산을 지배하던 용 군단이었다. 수십 마리의 드래곤이 내뿜는 위압감이 대기를 짓눌러 숨을 쉬는 것조차 버겁게 만들었다. 폐부 깊숙이 들어오는 공기가 날카로운 칼날처럼 목구멍을 긁었다.
가장 거대한 은색 용이 성벽 바로 위까지 고개를 들이밀었다. 놈의 안광이 레온하르트의 안경 너머 시선과 충돌했다. 용의 입술이 들썩이며 낮은 진동이 울려 퍼졌다. 성벽 아래의 가옥들이 그 진동만으로도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라 시야를 가렸으나 용의 거대한 실루엣은 더욱 선명해졌다.
"인간의 법사여. 새로운 조약은 우리를 구속하지 못한다."
용의 언령이 물리적인 충격파가 되어 레온하르트의 코트자락을 거칠게 뒤흔들었다. 그는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감추기 위해 법전의 모서리를 꽉 맞잡았다. 가죽 표지가 손톱에 눌려 움푹 패였다. 그는 차갑게 식은 안경테를 가운데 손가락으로 밀어 올리며 대답을 준비했다. 목 안쪽이 바짝 말라붙어 거친 소리가 났다.
"우리는 조약의 갱신을 보러 온 것이 아니다. 이곳에 떨어진 동족의 비늘과 그 영혼의 잔재를 회수하러 왔다."
용의 선언과 동시에 주변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졌다. 성벽의 돌들이 비명을 지르며 하얗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냉기는 레온하르트의 구두 밑창을 타고 올라와 발목을 굳게 만들었다. 그는 근육이 경직되는 것을 느끼며 아스테리아 대륙의 법전 제3장 12조를 나직하게 읊조렸다. 법의 문장은 그의 유일한 방패이자 무기였다.
아이린이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손이 검 손잡이를 거칠게 두드렸다. 규칙적인 금속음이 정적을 깼다. 그녀의 눈에는 평소보다 짙은 살의가 서려 있었다.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고 어깨는 사냥을 앞둔 맹수처럼 팽팽하게 긴장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아 허공을 갈랐다.
"감히 어디라고 발을 들이느냐!"
아이린의 외침과 함께 뿜어져 나와야 할 청백색의 검기가 보이지 않았다. 칼날 끝에서 희미하게 일렁이던 마나는 형체를 갖추기도 전에 대기 중으로 흩어졌다. 도시 전체를 감도는 마나 고갈 현상이 기사의 힘마저 앗아간 것이다. 아이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평생을 수련해온 힘이 한순간에 연기처럼 증발한 감각은 그녀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마나가 없으면 법도 힘을 잃는다. 그게 너희 인간들의 한계다."
은색 용이 비웃듯 콧김을 내뿜었다. 그 여파만으로도 성벽 위에 서 있던 병사들이 낙엽처럼 뒤로 나자빠졌다. 갑옷이 돌바닥에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레온하르트는 쓰러진 병사들을 힐끗 바라본 뒤 다시 용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그의 뇌 속에서는 수천 페이지의 법령과 고대 관습법들이 불꽃 튀듯 교차하고 있었다.
"아직 대화의 여지는 남아 있다."
레온하르트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그는 품 안에서 낡은 양피지 한 장을 꺼내 높이 들었다. 용들의 시선이 그 작은 종이 조각에 쏠렸다. 종이는 용의 숨결에 파르르 떨렸으나 찢어지지는 않았다. 그 표면에는 고대 룬어가 미세한 빛을 내며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종이가 아닌, 500년 전의 계약이 담긴 매개체였다.
"아스테리아 대륙 공통 관습법 제47조, 용의 연회 조항을 소환하겠다. 외교적 사절단으로 방문한 용들은 주최 측이 제공하는 연회와 휴식 기간 동안 어떠한 물리적 적대 행위도 할 수 없다. 이를 어길 시 너희가 그토록 숭상하는 고룡 의회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것으로 간주한다."
용들 사이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몇몇 용이 서로를 쳐다보며 낮은 울음소리를 냈다. 공기 중에 떠돌던 살벌한 마나가 일시적으로 잦아들었다. 하지만 은색 용은 거대한 앞발로 성벽의 난간을 으스러뜨렸다. 돌가루가 레온하르트의 구두 위로 쏟아졌다. 용의 눈등선이 험악하게 뒤틀렸다.
"연회라고? 이 굶주린 도시에 우리를 대접할 고기 한 점이라도 남아 있단 말이냐? 명분 없는 법률은 휴지 조각에 불과하다."
용의 거대한 주둥이가 레온하르트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뜨거운 열기가 그의 뺨을 달구었다. 수염이 타는 듯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레온하르트는 뒷걸음질 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법전의 다음 페이지를 넘기며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 셔츠를 적셨으나 표정은 여전히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법은 고기의 양으로 증명되는 것이 아니다. 합의된 절차의 이행으로 증명된다. 아델가드는 이미 연회를 위한 마나 정수를 준비했다."
레온하르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용의 안광 속에서 단순한 분노 이상의 것을 읽어냈다. 그들은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발락의 죽음이 아닌, 조약의 근간이 흔들리는 현상 그 자체를 경계했다. 그들의 거대한 날갯짓이 조급하게 허공을 쳤다.
성벽 아래, 폐허가 된 하층민 구역에서 정체불명의 소음이 들려왔다. 굶주림과 공포에 질려 숨어있어야 할 부랑자들이 하나둘씩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으나 발걸음은 기묘할 정도로 일정했다. 수백 명의 발소리가 하나의 고동 소리처럼 합쳐져 지면을 흔들었다.
레온하르트는 그들의 움직임에서 기시감을 느꼈다. 그것은 군대의 행진이라기보다는 거대한 기계 장치의 부속품들이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에 가까웠다. 사람들의 피부 위로 푸른색의 회로가 돋아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레온하르트의 팔에 새겨진 룬 문자와 공명하며 기괴한 빛을 내뿜었다.
아이린이 검을 고쳐 쥐며 레온하르트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팔에는 소름이 돋아 있었다. 그녀는 거리의 군중들을 내려다보며 검 손잡이를 더욱 강하게 압박했다. 삐걱거리는 가죽 소리가 날카롭게 들렸다.
"레온, 저들이 이상해. 인간의 기척이 아니야."
그녀의 말대로였다. 거리로 나온 노인과 아이들은 마치 인형처럼 팔다리를 꺾으며 전진했다. 그들이 내뱉는 숨결은 하얀 김이 되어 허공으로 흩어졌다. 용들은 갑작스러운 변화에 당황한 듯 고도를 높였다. 하늘을 뒤덮었던 은색 그림자들이 흩어지며 구름 사이로 창백한 달빛이 스며들었다.
그 군중 사이에서 허리가 굽은 노인 하나가 레온하르트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노인의 누더기 옷 사이로 낡은 금속 표식이 보였다. 500년 전 사라졌다고 알려진 고대 기사단의 상징이었다. 녹슨 표식은 달빛을 받아 둔탁하게 빛났다. 노인의 발걸음이 멈출 때마다 지면에 새겨진 룬 문자가 밝게 타올랐다.
노인은 성벽 위를 올려다보며 레온하르트와 시선을 맞췄다. 그의 손에는 녹슬고 투박한 철제 열쇠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열쇠의 머리 부분은 용의 심장 모양을 본떠 만들어져 있었다. 노인의 주름진 손가락이 열쇠를 쥔 채 가늘게 떨렸다.
"아스텔의 후예여. 너무 늦게 찾아왔군."
노인의 목소리는 바람에 섞여 들릴 듯 말 듯 했으나 레온하르트의 귓가에는 천둥소리처럼 박혔다. 그는 안경을 고쳐 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노인의 손을 주시했다. 노인이 든 것은 단순한 열쇠가 아니었다. 그것은 대륙의 마나 흐름을 강제로 제어하는, 시간의 탑 최하층으로 향하는 마스터 키였다.
레온하르트의 코에서 붉은 피가 한 방울 떨어졌다. 룬 문자와의 공명이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는 가슴을 짓누르는 압박감을 견디며 성벽 난간을 붙잡았다. 차가운 돌의 감각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노인은 손에 든 열쇠를 허공에 대고 천천히 비틀었다.
육중한 기계음이 아델가드 지하 깊은 곳에서 울려 퍼졌다. 대지가 요동치며 성벽에 거대한 균열이 생겼다. 균열 사이로 푸른 마나의 빛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용들은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고 은색 용조차 거대한 날개를 파닥이며 뒤로 물러났다.
노인이 성벽 계단을 타고 올라와 레온하르트 앞에 섰다. 그는 피 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열쇠를 레온하르트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금속의 서늘함이 룬 문자의 열기를 식혔다. 노인의 눈 속에 담긴 슬픔과 기대가 레온하르트의 시선과 얽혔다.
"이것이 자네 아버지가 목숨을 걸고 지킨 조약의 실체라네."
레온하르트는 열쇠를 꽉 쥐었다. 날카로운 금속 모서리가 손바닥을 파고들어 새로운 통증을 만들어냈다. 그는 멀리 보이는 시간의 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탑의 꼭대기에서 회전하는 거대한 톱니바퀴들이 멈추지 않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유산을 받으러 오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