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탑 지하 7층. 거대한 강철 톱니바퀴들이 맞물려 돌아가는 굉음이 고막을 짓눌렀다. 사방에서 뿜어져 나오는 증기가 시야를 뿌옇게 흐렸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바닥의 금속판이 기분 나쁜 진동을 전해왔다. 레온하르트는 손바닥에 닿는 열쇠의 서늘한 감촉에 집중하며 안경테를 밀어 올렸다.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으나 그는 시선을 고정했다.
공기가 비릿하군.
그의 나직한 읊조림이 기계 소음에 파묻혔다. 뒤를 따르던 아이린이 검 손잡이를 거칠게 두드렸다. 금속 마찰음이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그녀의 눈동자가 주변의 어둠을 훑으며 예민하게 빛났다. 에라스무스는 콧수염을 비틀며 벽면에 새겨진 룬 문자들을 해독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돋보기 너머의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이건 단순한 탑이 아니야. 대륙 전체의 마나를 빨아들이는 거대한 흡입구라고.
에라스무스의 목소리가 젖은 낙엽처럼 떨렸다. 그 순간 증기 너머에서 금속성이 섞인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안개가 소용돌이치며 갈라졌다.
정확한 진단이다. 늙은 마법사.
카엘 폰 아델가드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의 피부 위로 푸른색 핏줄이 기괴하게 솟아올라 있었다. 눈동자는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세로로 찢어진 황금빛 눈동자가 레온하르트를 꿰뚫었다. 카엘이 입을 열자 단순한 음성이 아닌 파동이 공간을 뒤흔들었다.
고개를 숙여라. 미개한 종족의 법무관이여.
그것은 드래곤의 언령이었다. 공기 중의 입자들이 카엘의 명령에 반응하며 레온하르트의 어깨를 짓눌렀다. 무릎뼈가 삐걱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레온하르트는 이를 악물고 허리를 곧게 폈다. 입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번졌다. 혀끝으로 느껴지는 점막의 통증이 오히려 정신을 맑게 했다.
언령의 모사라니. 법적으로는 사체 훼손 및 금기 마법 사용죄에 해당하겠군.
레온하르트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가슴 포켓에 꽂힌 법전의 모서리를 더듬었다. 가죽 표지의 질감이 손가락 지문에 선명하게 박혔다. 카엘은 비웃으며 손을 뻗었다.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주변의 톱니바퀴들이 역방향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기계장치가 비명을 지르며 파편을 튀겼다.
네가 법전을 읽을 때 나는 용의 심장을 씹어 삼켰다.
카엘의 외침과 함께 강력한 마나의 파동이 휘몰아쳤다. 아이린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밀려났다. 그녀의 검이 바닥을 긁으며 불꽃을 튀겼다. 레온하르트는 품 안에서 노인에게 받은 열쇠를 꺼내 들었다. 은색 금속이 증기 속에서 희미하게 빛을 냈다.
아이린. 멈춰. 직접 공격은 무의미하다.
검을 뽑아 달려들려던 아이린이 멈칫했다. 그녀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레온하르트는 카엘의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 탑 중앙의 제어 장치로 발을 옮겼다. 발등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증기가 장화를 적셨다.
카엘. 너는 아델가드의 마나를 흡수해 드래곤의 권능을 흉내 내고 있지. 하지만 이 장치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정교하다.
레온하르트의 손끝이 제어판 위의 고대 룬어들을 훑었다. 500년 전의 기록들이 뇌릿속을 선명하게 스쳐 지나갔다. 아버지가 남긴 일기장의 낡은 종이 냄새가 코끝을 스치는 듯했다. 이 탑은 마나를 공급하는 곳이 아니었다. 마나의 흐름을 왜곡해 가두는 거대한 감옥이었다.
이곳의 설정을 변경하면 네 몸 안의 마나는 역류하게 된다. 법적 용어로는 강제 집행이라 부르지.
카엘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그는 광기 어린 비명을 지르며 언령을 쏟아냈다.
죽어라. 사라져라. 무너져라.
언령이 물리적인 충격파가 되어 레온하르트의 등을 강타했다. 척추를 타고 흐르는 고통에 눈앞이 잠시 흐려졌다. 코끝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져 제어판을 적셨다. 레온하르트는 비틀거리면서도 열쇠를 제어 구멍에 밀어 넣었다. 금속과 금속이 맞물리는 둔탁한 감각이 손목을 타고 전해졌다.
에라스무스. 지금이다. 3번 회로의 마나 농도를 영으로 고정해.
에라스무스가 허둥지둥 지팡이를 휘둘렀다. 푸른 마법진이 제어판 주위에 펼쳐지며 기계음을 억눌렀다. 카엘은 자신의 몸이 공중에 떠오르는 것을 느끼며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그의 피부 아래에서 마나가 폭주하며 불규칙하게 요동쳤다. 혈관이 터져 나가며 옷자락이 붉게 물들었다.
이럴 리가 없다. 내가 드래곤의 힘을 가졌는데.
카엘의 목소리가 찢어진 가죽처럼 갈라졌다. 레온하르트는 열쇠를 끝까지 돌렸다. 철컥 소리와 함께 탑 전체가 거대한 맥동을 일으켰다. 벽면에 새겨진 수천 개의 룬이 일제히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빛의 줄기들이 거미줄처럼 얽히며 공간을 메웠다.
법은 권력의 도구가 아니다. 권력을 묶는 사슬이지.
레온하르트의 오른팔에 새겨진 조약의 낙인이 황금빛으로 타올랐다. 살점이 타들어 가는 냄새가 진동했다. 그의 피가 제어 장치 안으로 흘러 들어가자 탑의 진동이 아델가드 시내 전체로 퍼져 나갔다. 지상의 건물들이 요동치며 먼지를 일으켰다.
광장에 모여 있던 시민들이 일제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들의 눈동자에 기이한 푸른 회로가 그려졌다. 시간의 탑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거대한 스크린처럼 하늘을 뒤덮었다. 구름 사이로 거대한 환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500년 전의 진실이 영상이 되어 흐르기 시작했다. 인간 영웅 에드윈이 드래곤의 심장을 찌르려던 순간이었다. 그를 멈춰 세운 것은 용의 마법이 아니었다. 그것은 동료들의 배신과 비겁한 타협이 만들어낸 법의 함정이었다. 조약문의 여백에 숨겨진 핏빛 글자들이 대륙의 하늘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저건 우리 조상들이 드래곤과 맺은 조약이 아니야.
길가에 서 있던 노인이 중얼거렸다. 시민들의 집단 지성이 탑의 증폭 장치와 공명하며 거대한 마나의 바다를 형성했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영혼이 깎여 나가는 고통 속에서도 눈을 부라렸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시야를 방해했다.
카엘의 몸이 마나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뒤틀렸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탑 내부를 가득 채웠다. 하지만 레온하르트의 시선은 카엘이 아닌 빛나는 룬 문자 너머의 허공을 향했다. 그림자가 드리워진 공간에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황금빛으로 타오르던 탑의 벽면이 갑자기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시민들의 머릿속에 흐르던 영상이 지지직거리며 끊겼다. 레온하르트의 코에서 흐르던 피가 검은색으로 변해 바닥을 적셨다. 바닥의 금속판이 부식되며 검은 연기를 내뿜었다.
이건 내가 의도한 반응이 아니야.
에라스무스의 비명 섞인 외침이 들렸다. 탑의 꼭대기에서 정체불명의 거대한 검은 날개가 돋아나 아델가드의 하늘을 가렸다. 드래곤들조차 공포에 질려 지상으로 추락하고 있었다. 비늘이 벗겨진 용들이 성벽에 부딪히며 굉음을 냈다.
레온하르트는 검게 변해가는 자신의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룬 문자가 타오르며 새로운 문장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 그것은 초대장이었다. 대륙 너머 인간도 드래곤도 아닌 존재를 향한 핏빛 부름이었다. 손가락 끝에서 검은 기운이 피어올랐다.
누가 문을 열었지?
레온하르트의 물음에 대답하듯 탑의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거대한 안구가 번뜩였다. 그것은 세상의 법을 집행하는 자의 눈이었다. 생기 없는 안구가 레온하르트의 존재를 훑었다.
계약 위반을 확인했다.
탑 전체를 울리는 무미건조한 목소리와 함께 레온하르트의 가슴에 보랏빛 사슬이 박혔다. 그는 바닥으로 고꾸라지며 카엘의 일그러진 미소를 보았다. 카엘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이며 마지막 단어를 내뱉었다.
말했지. 레온하르트. 너도 결국 괴물이 될 거라고.
카엘의 육체가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순간 탑의 모든 출구가 폐쇄되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사슬이 레온하르트를 심연으로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아이린의 비명 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레온하르트. 정신 차려. 내 손을 잡아.
아이린의 외침이 들렸으나 그의 손은 허공을 휘저을 뿐이었다. 바닥이 사라진 자리에는 끝을 알 수 없는 어둠만이 소용돌이쳤다. 레온하르트는 가슴에 박힌 사슬을 움켜쥐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심장을 얼려버릴 듯했다.
에라스무스. 이곳의 마나 흐름을 차단해. 어서.
그의 명령은 공허한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탑의 벽면이 안쪽으로 굽어들며 기계 장치들을 짓이겼다. 톱니바퀴들이 튕겨 나가며 레온하르트의 어깨를 스쳤다. 뜨거운 통증이 느껴졌지만 피는 흐르지 않았다. 상처 부위에서 검은 연기만이 새어 나왔다.
이건 법적 허용치를 넘어선 힘이다.
그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자신이 열어젖힌 것은 500년 전의 진실만이 아니었다. 인간의 법으로도 드래곤의 언령으로도 통제할 수 없는 금기였다. 보랏빛 사슬이 그의 영혼을 옭아매며 심장부로 파고들었다.
아버지가 말했던 법의 함정이 이것이었나.
머릿속에서 오래된 기억의 파편들이 어지럽게 흩어졌다. 아버지는 항상 법전의 마지막 장을 넘기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곳에는 조약의 체결자가 지불해야 할 진짜 대가가 적혀 있었다. 레온하르트의 눈동자가 보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아직 판결은 끝나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바닥에 떨어진 법전을 손에 넣었다. 가죽 표지가 검게 타들어 갔으나 조약문의 원본만은 빛을 잃지 않았다. 사슬이 그를 어둠 속으로 완전히 끌어넣기 직전 레온하르트는 법전의 마지막 장을 거칠게 찢어냈다.
아이린. 이걸 가지고 나가서 자유 기사단에 전달해.
그의 손에서 떨어진 종이 조각이 빛의 화살이 되어 증기 사이를 뚫고 날아갔다. 아이린이 손을 뻗어 종이를 낚아채는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으나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돌렸다.
에라스무스. 너는 조약의 맹점을 분석해라. 내가 돌아올 때까지.
레온하르트의 신체가 어둠 속으로 완전히 잠겼다. 사방이 고요해졌다. 기계 장치의 소음도 동료들의 외침도 들리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규칙적인 심장 박동 소리만이 고막을 울렸다.
심판관의 자격을 확인한다.
그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눈앞의 안구가 더욱 크게 번뜩이며 그의 영혼을 들여다보았다. 레온하르트는 어둠 속에서 안경을 고쳐 썼다. 안경알이 보랏빛 광채에 반사되어 서늘하게 빛났다.
피고인의 진술을 듣겠다.
그 말과 함께 레온하르트의 가슴에서 솟아난 사슬이 거대한 법정의 기둥으로 변했다. 그는 자신을 짓누르는 압박감 속에서도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항변을 시작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