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빛 입자가 아델가드의 하늘을 가득 메웠다. 성벽 아래로 쏟아지는 빛무리 속에 비릿한 금속 향이 섞여 들었다. 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고개를 들어 허공을 응시했다. 공중에 떠오른 거대한 환상은 박제된 시간의 기록이었다. 비현실적인 고요가 광장을 짓눌렀다. 사람들의 거친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정적이 깊었다.
오래된 탁자를 사이에 두고 두 존재가 마주 앉아 있었다. 한 명은 레온하르트의 아버지였고 다른 하나는 거구의 사내였다. 사내의 등 뒤로 거대한 날개 그림자가 일렁였다. 용의 화신인 발락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잔에 술을 채웠다. 적대감보다는 깊은 피로가 그들의 얼굴에 서려 있었다. 탁자 위로 떨어진 촛농이 굳어가는 소리마저 들릴 듯했다.
우리가 악역이 되어야 하네.
레온하르트의 아버지가 잔을 비우며 낮게 읊조렸다. 발락은 거친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과 용의 공멸을 막으려면 공공의 적이 필요했다. 조약은 평화의 상징이 아니라 증오를 묶어두는 족쇄여야 했다. 아버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 잔 속으로 떨어졌다.
아스텔, 자네의 아들이 감당할 수 있겠나.
발락의 물음에 아버지는 대답 대신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시민들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수백 년간 믿어온 증오의 근간이 뿌리째 흔들리는 소리였다. 광장을 지배하던 정적이 파도처럼 밀려갔다. 누군가 억눌린 신음을 내뱉었다.
전부 조작된 환상이다.
카엘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공기를 찢었다. 그는 단상 위에서 광기 어린 눈으로 군중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품 안에서 붉은빛이 감도는 비늘 하나를 꺼내 들었다. 발락의 역린에서 떼어낸 고대의 파편이었다. 비늘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이 주변의 공기를 차갑게 얼렸다.
저 가증스러운 사기꾼의 혓바닥을 믿지 마라.
카엘이 비늘을 허공으로 던졌다. 붉은 마력이 거미줄처럼 뻗어 나가 레온하르트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레온하르트의 등 뒤에서 보랏빛 사슬이 솟구쳐 올랐다. 사슬은 허공을 가로질러 발락의 목을 휘감았다. 금속의 마찰음이 고막을 긁었다.
윽.
레온하르트의 신체가 앞으로 꺾였다. 가슴 안쪽에서 뜨거운 인두를 들이미는 듯한 통증이 치솟았다. 시야가 붉게 물들며 거친 호흡이 터져 나왔다. 발락 또한 거대한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광장의 돌바닥이 용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거미줄처럼 갈라졌다.
생명력 공유 마법이다.
카엘이 입꼬리를 비틀며 천천히 다가왔다. 구두굽이 돌바닥을 때리는 소리가 고막을 자극했다. 그는 레온하르트의 턱을 거칠게 잡아 들어 올렸다. 카엘의 손에서 지독한 유황 냄새가 풍겼다.
네가 나를 공격하면 그 통증은 곧 너와 저 용의 것이 된다.
레온하르트는 이를 악물었다. 잇새로 붉은 선혈이 흘러내렸다. 신체의 감각이 발락의 비대함과 동기화되고 있었다. 거대한 심장 박동이 자신의 가슴 속에서 울리는 착각이 들었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마나가 전신을 불태우는 듯했다.
이것이 네가 그토록 숭상하던 법의 결과물이다.
카엘이 속삭이며 레온하르트의 뺨을 가볍게 쳤다. 비굴한 조항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조약 제8조, 시전자와 대상자의 생명은 하나로 귀속된다. 법은 보호의 수단이 아니라 사형 집행인의 밧줄로 변해 있었다. 카엘의 비릿한 웃음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아직도 정의를 운운할 텐가.
카엘의 목소리에는 승리감에 도취한 조소가 섞여 있었다. 주변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시민들은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누구도 감히 나서지 못하는 침묵의 현장이었다. 공포는 전염병처럼 빠르게 광장을 잠식해 나갔다.
레온하르트는 안경을 고쳐 쓰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가락 끝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신경이 타들어 가는 감각이 전신을 훑었다. 땀방울이 턱끝에 맺혀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우리를 묶은 건 법이 아니라, 찢을 수 없는 피의 사슬이다.
레온하르트가 고개를 들어 카엘의 눈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눈동자 속에서 푸른 룬 문자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법이 아니었다. 세상의 질서를 재정의하는 고대의 언어였다. 공기가 기이하게 진동하며 레온하르트의 주변을 감쌌다.
카엘은 눈썹을 움찔거리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혹감이 서린 눈빛이었다. 그의 얼굴에서 여유가 조금씩 깎여 나갔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레온하르트는 대답 대신 품 안에서 낡은 단검을 꺼냈다. 아버지가 유품으로 남긴, 오리하르콘으로 제련된 작은 칼날이었다. 칼날의 표면에 새겨진 문양들이 푸른 빛을 내뿜었다.
공유된 생명은 양날의 검이지.
칼날이 차가운 빛을 반사하며 허공을 갈랐다. 그는 주저 없이 단검의 끝을 자신의 가슴으로 향했다. 심장을 관통하는 고통은 연결된 모든 존재에게 전달될 터였다. 레온하르트의 손등에 푸른 핏대가 솟아올랐다.
미쳤군.
카엘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는 마법을 해제하려 급히 수인을 맺었다. 그러나 이미 발동된 조약의 권능은 그의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카엘의 손가락이 미친 듯이 꼬이며 경련했다.
레온하르트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식은땀이 눈을 찔러 시야가 흐릿했다. 그럼에도 칼날은 멈추지 않고 옷감을 뚫었다. 가슴의 근육이 날카로운 금속을 받아들이며 비명을 질렀다.
멈춰라.
지면을 울리는 거대한 진동과 함께 그림자가 덮쳐왔다. 추락했던 발락이 거대한 날개를 펼치며 도약했다. 용의 발톱이 카엘의 어깨를 가차 없이 짓눌렀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광장에 선명하게 울렸다.
크악.
카엘의 비명이 광장에 울려 퍼졌다. 발락의 눈동자가 황금빛으로 타오르며 카엘의 정신을 유린했다. 강제 체결되었던 마법의 주도권이 용의 의지 아래로 넘어갔다. 카엘의 눈에서 핏물이 배어 나왔다.
아스텔의 피는 결코 굴복하지 않는다.
발락이 울부짖으며 카엘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용의 포효에 성벽의 돌들이 비명을 지르며 뒤틀렸다. 레온하르트는 가슴에 닿았던 단검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셔츠 위로 붉은 점이 번져나갔다.
용의 비늘이 붉게 달아오르며 조약의 낙인이 타올랐다. 카엘은 거품을 물며 사지를 비틀었다. 레온하르트는 비틀거리는 몸을 세우며 카엘에게 다가갔다. 구두굽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이제 피고인의 최후 진술을 듣지.
그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갑고 단호했다. 광장의 모든 시선이 무너진 권력자의 얼굴에 꽂혔다. 하늘을 메웠던 황금빛 입자들이 하나둘 사라지며 어둠이 찾아왔다. 차가운 밤바람이 옷깃을 스치고 지나갔다.
카엘은 공포에 질린 채 레온하르트의 구두를 붙잡았다. 살려달라는 비굴한 손짓이 허공을 저었다. 하지만 레온하르트의 눈에는 자비 대신 법전의 서늘한 조항만이 비쳤다. 카엘의 손가락이 레온하르트의 바짓단을 더럽혔다.
집행 유예는 끝났다.
레온하르트가 손을 뻗어 허공에 새로운 문자를 써 내려갔다. 공기가 진동하며 보랏빛 사슬이 다시금 요동쳤다. 사슬의 끝은 이제 카엘의 심장을 정조준하고 있었다. 보랏빛 안개가 카엘의 목을 서서히 조여왔다.
발락은 레온하르트의 등 뒤에서 거대한 숨을 몰아쉬었다. 용의 열기가 등 뒤를 뜨겁게 달구었다. 500년 전의 약속이 오늘 이 자리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었다. 용의 콧김이 레온하르트의 머리카락을 흩뜨렸다.
카엘의 눈동자가 뒤집히며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조약 파기의 대가가 그의 영혼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카엘의 피부 위로 검은 반점이 돋아나며 썩어 들어갔다.
이것이 네가 원하던 절대적인 법의 심판이다.
레온하르트의 선언과 함께 사슬이 카엘의 가슴을 관통했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카엘의 신체가 경련했다. 그 순간, 멀리 떨어진 천공의 둥지에서 거대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육중한 금속음이 대지를 흔들었다.
시간의 탑이 기동을 멈추고 거대한 증기를 뿜어냈다. 지면 아래 잠들어 있던 고대의 장치들이 하나둘 깨어나는 진동이었다. 탑의 꼭대기에서 푸른 불꽃이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레온하르트는 안경알 너머로 무너지는 탑을 바라보았다. 그의 코끝에서 붉은 피가 한 방울 떨어져 돌바닥을 적셨다. 머릿속에서 수천 개의 회로가 타버리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이제 시작이지.
에라스무스가 어둠 속에서 나타나 콧수염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는 학구적인 호기심과 함께 깊은 우려가 담겨 있었다. 에라스무스의 손에 들린 고대 서적이 파르르 떨렸다.
아이린은 검을 거두며 레온하르트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손은 여전히 검 손잡이를 꽉 쥐고 있었다. 아이린의 갑옷 사이로 식은땀이 흘러내려 바닥을 적셨다.
끝난 건가요?
레온하르트는 대답 대신 품 안에서 찢어진 조약서 조각을 꺼냈다. 종이 위로 푸른 불꽃이 일며 새로운 문장이 나타났다. 그것은 조약의 내용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향한 초대장이었다. 문자들이 살아있는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저 너머에서 무언가 오고 있어.
발락이 하늘을 올려다보며 낮은 저음을 뱉었다. 구름 사이로 거대한 검은 날개의 실루엣이 비쳤다. 드래곤들조차 두려워하던 대륙 너머의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공기가 무겁게 눌리며 중력이 뒤틀렸다.
레온하르트는 입술을 굳게 다물며 안경테를 밀어 올렸다.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으나 시선은 고정되었다. 심장 근처의 통증이 갈수록 선명해졌다.
재판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하늘이 찢어지며 생겨난 거대한 균열이 있었다. 균열 너머로 수천 개의 붉은 눈동자가 아델가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붉은 눈들이 깜빡일 때마다 세상의 색이 하나둘 사라졌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팔에 새겨진 룬 문자가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공명이자 경고였다. 피부 아래에서 무언가 꿈틀대며 살을 찢고 나오려 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정체불명의 존재를 향해 법전을 치켜들었다.
다음 피고인은 누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