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델가드 외곽의 밀밭은 더 이상 황금빛이 아니었다. 바람이 불자 이삭들이 힘없이 꺾이며 회색 가루를 흩날렸다. 태양은 여전히 뜨거웠지만 대기 중의 생명력이 말라붙고 있었다. 흙바닥은 거북 등껍질처럼 갈라져 깊은 틈을 만들었다. 그 틈 사이로 푸른빛의 잔재가 연기처럼 피어오르다 사라졌다. 시간의 탑이 가동된 이후 마나의 흐름이 뒤틀린 결과였다. 농부 하나가 주저앉아 바스러진 흙을 만졌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은 곡식이 아니라 일 년의 생계였다.
중앙 광장은 비명에 가까운 소란으로 가득했다. 마나석 가격이 평소의 열 배를 넘어섰다는 공고가 붙은 탓이었다. 사람들은 서로의 멱살을 잡고 배급 순서를 다퉜다. 광장 한복판에는 용의 가면을 쓴 사내들이 단상 위에 올라 있었다. 그들은 붉은 완장을 차고 군중을 향해 팔을 휘둘렀다. 경제부 장관으로 복귀한 카엘의 추종자들이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확성 마법 없이도 광장 구석구석까지 날카롭게 꽂혔다.
이 모든 재앙은 조약을 파괴한 반역자 때문입니다.
사내의 손가락이 멀리 보이는 법률사무소 건물을 가리켰다. 군중의 시선이 일제히 그곳으로 쏠렸다. 레온하르트 반 아스텔이 우리에게서 용의 자비를 뺏어갔습니다. 용들이 분노하여 대지의 마나를 거두어가고 있는데 그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단상 아래에서 누군가 돌을 던졌다. 돌은 사무소의 굳게 닫힌 창문에 맞고 힘없이 굴러떨어졌다. 분노는 전염병처럼 빠르게 번져나갔다. 배고픈 군중에게 논리는 사치였고 분풀이 대상은 명확했다.
사무소 안의 공기는 바깥보다 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에라스무스는 콧수염을 필사적으로 꼬며 마법 측정기를 들여다보았다. 측정기의 바늘은 바닥을 친 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공기 중의 마나 농도가 평소의 오 퍼센트도 되지 않는다는 신호였다. 그는 연신 마른침을 삼키며 구석에 서 있는 레온하르트를 살폈다. 레온하르트는 안경테를 손가락으로 밀어 올리며 책상 위에 펼쳐진 서류들을 응시했다. 그의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표정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레온하르트, 이건 단순한 가뭄이 아니야.
에라스무스의 목소리가 떨렸다. 누군가 인위적으로 마나의 흐름을 차단하고 있어. 마치 거대한 댐으로 물줄기를 막아버린 것처럼 말이야. 레온하르트는 대답 대신 법전의 한 페이지를 넘겼다. 조약 제칠조 사항, 천재지변 시의 자원 우선 배분권. 그는 나직하게 조항을 읊조리며 깃펜을 들었다. 잉크가 종이 위에 번지며 날카로운 글씨를 써 내려갔다. 그의 시선은 창밖의 소란이 아닌 법전 속의 질서에 고정되어 있었다.
쾅 소리와 함께 집무실 문이 열렸다. 아이린이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들어왔다. 그녀의 손은 이미 검 손잡이를 거칠게 두드리고 있었다. 거리의 상황이 최악이라며 그녀가 거친 숨을 내뱉었다. 카엘의 놈들이 시장의 마나석을 깡그리 쓸어갔어. 상인 조합인 황금 독수리회도 입을 맞춘 듯 창고 문을 걸어 잠갔고. 이제 시민들은 밥을 짓기 위한 마나석조차 구하지 못하고 있어. 아이린의 눈에 어린 분노가 레온하르트의 무표정한 얼굴에 부딪혔다.
레온하르트는 깃펜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벽에 걸린 코트를 집어 들었다. 시장의 마나석 공급이 차단되었다면 법적 강제력을 동원해야 합니다. 그는 단호한 어조로 말하며 문으로 향했다. 비상 자원 관리법에 의거하여 중앙 창고를 개방하도록 명령서를 작성했습니다. 아이린이 그의 앞을 가로막으며 어깨를 붙잡았다. 법이 밥을 먹여주지 않는다는 걸 아직도 모르는 거야. 지금 밖은 당신을 찢어 죽이려는 사람들로 가득하다고.
내보내 주십시오.
레온하르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아이린의 손을 차갑게 뿌리치고 복도로 나섰다. 복도 벽에 걸린 거울 속의 자신을 잠시 응시했다. 안경 너머의 눈동자가 평소보다 짙은 빛을 띠고 있었다. 그는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억눌렀다. 법은 감정에 휘둘리는 도구가 아니었다. 오히려 광기를 잠재울 유일한 굴레이자 방패였다. 그가 건물 정문을 열자 뜨거운 열기와 함께 욕설이 쏟아져 들어왔다.
살인마 아스텔은 물러가라.
군중 속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레온하르트는 쏟아지는 비난 속에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구두 굽소리가 돌바닥에 부딪히며 규칙적인 박자를 만들어냈다. 아이린이 검을 반쯤 뽑아 든 채 그의 곁을 지켰다. 카엘의 추종자들이 길을 막아섰지만 레온하르트의 서늘한 눈빛에 주춤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는 광장 중앙의 카엘에게 다가갔다. 카엘은 화려한 예복을 입고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역자께서 몸소 나오셨군.
카엘이 비아냥거리며 군중의 환호를 유도했다. 배고픈 군중에게 법전은 땔감보다 가치가 없다는 걸 아직도 모르는군. 그는 레온하르트의 손에 들린 명령서를 낚아채더니 그대로 찢어 발겼다. 종이 조각들이 눈송이처럼 허공에 흩날렸다. 사람들은 카엘의 행동에 환호하며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대지의 진동이 레온하르트의 발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그것은 분노의 진동이자 통제할 수 없는 파멸의 전조였다.
시장 교란은 중죄입니다, 대재상.
레온하르트가 안경을 고쳐 쓰며 차갑게 대꾸했다. 당신은 지금 아델가드 생존권 보장법 제십이조를 위반하고 있습니다. 카엘은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리며 그에게 바짝 다가왔다. 그의 숨결에서 드래곤의 언령을 흉내 내는 기괴한 마나의 냄새가 났다. 법이라니, 이 상황에서도 그 잘난 종이 쪼가리 타령인가. 그는 레온하르트의 멱살을 잡으려다 아이린의 검 끝이 목에 닿자 멈춰 섰다. 카엘의 눈에 살의가 스쳤다.
마나석이 없어서 죽어가는 건 내가 아니라 저들이야.
카엘이 손을 넓게 벌려 광장의 군중을 가리켰다. 황금 독수리회의 창고는 비어 있고 중앙 은행의 금고도 텅 비었지. 자, 이제 위대한 법률가께서 어떻게 기적을 행하실지 구경해볼까. 레온하르트는 대답 없이 품 안에서 또 다른 서류 뭉치를 꺼냈다. 그것은 중앙 창고의 강제 집행권이었다. 그는 카엘을 지나쳐 광장 북쪽에 위치한 거대한 철문에 도달했다. 아델가드의 모든 마나 자원이 비축된 최후의 보루였다.
문 앞을 지키던 병사들은 레온하르트의 서슬 퍼런 기세에 밀려 길을 내주었다. 아이린이 거대한 빗장을 들어 올렸고 에라스무스가 해제 주문을 외웠다. 육중한 철문이 비명을 지르며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문틈 사이로 뿜어져 나와야 할 푸른 마나의 광휘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습하고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레온하르트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는 품 안의 아티팩트가 가늘게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창고 안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에라스무스가 지팡이 끝에 빛을 밝히자 거대한 공간의 실체가 드러났다. 마나석이 가득 차 있어야 할 선반들은 텅 비어 있었다. 바닥에는 마나석의 잔해조차 남지 않은 채 기이한 붉은 가루들만이 흩뿌려져 있었다. 아이린이 헛웃음을 터뜨리며 검을 내려놓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우리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어둠 속에서 무언가 번뜩였다.
레온하르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창고 중앙으로 향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소름 끼치게 울렸다. 빛이 닿은 곳에는 마나석 대신 다른 것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것은 수만 개의 붉은 비늘이었다. 8화에서 언급되었던, 인간의 영혼과 생명력을 담보로 드래곤에게 바쳐야 했던 용의 혈세였다. 비늘 하나하나에는 조약의 문구들이 핏빛으로 새겨져 기괴한 안개처럼 증기를 내뿜고 있었다.
이건 마나석이 아니야.
에라스무스가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이건 저주받은 용의 비늘들이라고. 레온하르트는 바닥에 떨어진 비늘 하나를 집어 들었다. 손바닥이 타들어 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그는 놓지 않았다. 비늘 뒤편에는 그의 아버지, 레오나르도 반 아스텔의 인장이 희미하게 찍혀 있었다. 그것은 경제 시스템을 지원하는 자산이 아니라 아스테리아의 모든 마나를 집어삼키는 거대한 아가리였다. 레온하르트의 코에서 붉은 피 한 방울이 비늘 위로 떨어졌다.
비늘들이 일제히 공명하며 불길한 진동을 내기 시작했다. 창고 밖에서 들려오던 군중의 함성이 순식간에 공포 섞인 비명으로 바뀌었다. 아델가드의 하늘이 붉게 물들며 거대한 그림자가 도시 전체를 덮쳐왔다. 레온하르트는 비늘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뒤를 돌아보았다. 창고 문가에 서 있는 카엘의 얼굴에는 승리자의 미소가 아닌, 통제 불능의 공포를 마주한 광기가 서려 있었다.
조약은 아직 끝나지 않았군.
레온하르트는 피가 묻은 비늘을 카엘의 발치로 던졌다. 붉은 비늘이 바닥에 닿는 순간 지면이 폭발하듯 솟구쳤다. 창고 천장이 무너지며 거대한 발톱이 허공을 찢고 내려왔다. 먼지 구름 사이로 황금빛 안광이 번뜩이며 레온하르트의 심장을 겨눴다. 그는 도망치는 대신 품 안에서 낡은 법전 초안을 꺼내 들었다. 떨리는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수정된 조항이 아닌 고대의 룬어였다.
이건 법이 아니라 제물이었어.
에라스무스가 머리를 감싸 쥐며 바닥에 엎드렸다. 용의 숨결이 창고 내부를 가득 채우며 산소를 집어삼켰다. 레온하르트의 시야가 붉은 안개로 가려졌지만 그는 눈을 감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 거대한 그림자를 마주했다. 아티팩트가 내뿜는 푸른 빛이 용의 압력을 튕겨내며 불꽃을 일으켰다. 그의 입술이 마른 소리를 내며 조약의 숨겨진 원문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죽음으로써 계약은 완성된다.
레온하르트의 목소리가 창고 안을 울리자 비늘들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카엘의 비명 소리가 무너지는 돌무더기 속으로 사라졌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팔에 새겨지는 문자의 통증을 견디며 손을 뻗었다. 용의 발톱이 그의 가슴팍에 닿기 직전 공간이 기이하게 뒤틀렸다. 그것은 마법이 아니라 세상의 질서 자체가 재편되는 소리였다. 그는 비릿한 피 냄새를 맡으며 최후의 단어를 내뱉었다.
기각합니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거대한 폭발이 아델가드를 뒤흔들었다. 창고의 철문이 종이처럼 구겨져 날아갔고 광장의 군중은 충격파에 휩쓸려 쓰러졌다. 먼지가 걷힌 자리에는 더 이상 용의 그림자도, 카엘의 오만한 웃음소리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무너진 폐허 한가운데 선 레온하르트만이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법전은 이미 잿가루가 되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아이린이 비틀거리며 일어나 그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검은 이미 부러진 채 자루만 남은 상태였다. 그녀가 입가의 피를 닦아내며 레온하르트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끝난 거야, 레온하르트. 그는 대답 대신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옷이 찢겨 나간 자리에는 룬어가 아닌 드래곤의 비늘이 돋아나고 있었다. 그것은 승리의 훈장이 아니라 저주받은 계약의 새로운 시작이었다.
에라스무스가 떨리는 손으로 그의 가슴을 가리켰다. 자네, 몸이 왜 이래. 레온하르트는 차가운 감각이 온몸으로 번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하늘 위로 수십 마리의 드래곤이 무리 지어 아델가드를 향해 활강하고 있었다. 그들의 포효가 대기를 찢으며 도시의 마지막 희망마저 짓밟았다. 레온하르트는 비늘이 돋아난 손으로 부러진 안경을 집어 던졌다.
이제 우리가 법입니다.
그는 옆에 떨어진 아이린의 부러진 검을 움켜쥐었다. 검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이 그의 혈관을 타고 뇌를 자극했다. 용의 본능과 인간의 이성이 충돌하며 머릿속에서 불꽃이 튀었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입을 열어 언령을 내뱉으려 했다. 그의 눈동자가 인간의 것이 아닌 세로로 찢어진 용의 동공으로 변해갔다.
도망치세요.
레온하르트가 아이린의 어깨를 밀쳐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이미 인간의 온기가 사라진 채 금속성이 섞여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목을 졸라오는 살의를 억누르며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흑색 마나가 아델가드의 성벽을 감싸 안았다. 그것은 보호를 위한 장벽이 아니라 사냥을 위한 그물이었다. 그는 자신을 집어삼키려는 거대한 힘에 맞서 이를 악물었다.
하늘을 뒤덮은 용들 중 가장 거대한 개체가 지상으로 내려앉았다. 대지가 비명을 지르며 내려앉았고 라그나 요새의 종소리가 절박하게 울려 퍼졌다. 용은 레온하르트의 변해버린 모습을 응시하며 기괴한 웃음을 흘렸다. 그것은 500년 전 조약을 체결했던 고룡의 목소리였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심장 박동이 용의 고동과 일치해가는 것을 느끼며 무릎을 꿇었다.
새로운 중재자가 탄생했군.
고룡의 언령이 레온하르트의 고막을 찢을 듯이 파고들었다. 아이린과 에라스무스는 이미 그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정신을 잃은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피가 섞인 가래를 뱉어내며 고개를 쳐들었다. 그의 시야에는 더 이상 법전의 조항들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대륙 전체를 휘감고 있는 마나의 실타래와 그것을 조종하는 비릿한 생명의 흐름이 선명하게 읽혔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늘로 덮인 팔이 기이한 힘을 내뿜으며 공기를 태웠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을 비웃는 고룡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저항이자 새로운 포식자로서의 첫 번째 선언이었다. 그는 자신의 영혼이 깎여 나가는 고통 속에서도 단 한 문장을 완성해냈다.
당신을 법정 모독죄로 처단하겠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레온하르트의 발밑에서 수천 개의 마나 칼날이 솟구쳐 올랐다. 고룡의 비늘을 관통하는 오리하르콘의 광채가 광장을 가득 메웠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심장을 쥐어짜는 언령의 고통을 비명 대신 웃음으로 흘려보냈다. 그는 이미 인간의 법을 넘어선 금기의 영역으로 발을 내디딘 상태였다. 고룡의 거대한 눈동자에 처음으로 경악의 빛이 스쳤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가슴에 돋아난 비늘을 거칠게 뜯어냈다. 생살이 찢겨 나가는 선명한 고통만이 그가 인간임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그는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손으로 고룡의 목을 겨냥해 도약했다. 아델가드의 무너진 성벽 너머로 붉은 달이 떠오르며 피의 서사시를 예고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결정지을 마지막 일격을 준비하며 소리쳤다.
판결을 집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