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겨 나간 가죽 종이들이 잿가루처럼 허공을 메웠다. 오백 년간 대륙을 옭아맸던 최후의 평화 조약이 파편이 되어 흩날렸다. 무릎을 꿇은 고룡들의 거대한 신형 위로 하얀 종이눈이 내려앉았다. 아델가드 중앙 광장은 기묘한 정적에 잠겨 있었다.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승리의 달콤함보다 눈앞의 현실이 주는 중압감이 더 컸다.
레온하르트는 부러진 안경테를 손가락으로 밀어 올렸다. 손등에 새겨진 룬 문자가 화끈거렸다. 혈관을 따라 흐르는 마나가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을 유발했다. 그는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자신이 새겨 넣은 새로운 법의 룬. 그것은 드래곤을 굴복시키는 계약인 줄 알았다. 하지만 뒤틀린 문양은 전혀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것은 거대한 재앙을 향한 초대장이었다.
"우리가 이겼어. 정말로 이긴 거야!"
누군가의 외침이 정적을 깼다. 제방이 무너지듯 시민들의 환호성이 광장을 가득 채웠다. 사람들은 서로를 껴안고 눈물을 흘렸다. 오백 년의 수탈이 끝났다는 해방감이 광장을 휘감았다. 하지만 그 환호는 오래가지 않았다. 기쁨은 금세 시커먼 증오로 변질되었다.
"저 괴물들의 목을 쳐라!"
"우리 가족의 복수를!"
광장 한구석에서 거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낡은 갑옷을 입은 자유 기사단원들과 무장한 시민들이 전진했다. 그들의 손에는 녹슨 단검과 곡괭이가 들려 있었다. 목표는 명확했다. 마력 억제 룬에 묶여 고개를 숙인 용들이었다. 기사단의 선두에는 아이린이 있었다. 그녀의 검 끝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차가운 바닥을 딛고 일어섰다.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용들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아이린의 검날이 그의 가슴팍 직전에서 멈췄다.
"비켜, 레온하르트."
아이린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검 손잡이를 쥔 그녀의 장갑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녀의 시선은 레온하르트 너머, 거룡 발락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발락은 그녀의 스승을 죽인 원수였다. 기사단의 자부심을 짓밟고 대륙을 공포로 몰아넣은 장본인이기도 했다.
"법적 절차가 남았습니다, 아이린 경."
레온하르트가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는 광장의 소란 속에서도 선명하게 울렸다. 그는 품 안에서 낡은 법전을 꺼내 들었다. 안경 너머의 눈동자에는 감정이 배제되어 있었다.
"절차? 저들이 우리에게 절차를 지켰나? 내 스승님이 죽을 때, 저 괴물이 법을 따졌느냐고!"
아이린이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외침에 동조하는 시민들이 거칠게 발을 구르며 다가왔다. 군중의 압박이 레온하르트의 어깨를 짓눌렀다. 뜨거운 열기가 목덜미를 타고 올라왔다. 등 뒤에서는 용들의 거친 숨소리가 진동처럼 전달되었다. 비늘이 스치는 소리가 금속성 마찰음처럼 들렸다.
"복수는 또 다른 분쟁의 씨앗이 될 뿐입니다. 우리는 조약을 파기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기로 했습니다."
레온하르트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으나 법전을 쥔 힘은 단호했다.
"질서? 이건 정의야. 피에는 피로 갚는 것이 이 땅의 오래된 관습이다!"
아이린이 검을 치켜들었다. 주변의 기사들도 일제히 무기를 뽑았다. 금속의 서늘한 기운이 광장을 메웠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레온하르트는 안경테를 다시 한번 고쳐 쥐었다. 그는 감정을 죽이고 뇌 속에 저장된 법령들을 끄집어냈다.
"아스테리아 자치령 법전 제3장 12조. 항복한 포로에 대한 즉결 처분은 금지한다. 또한, 새로운 조약의 제1항에 따라 드래곤의 처분권은 수호자인 저에게 귀속됩니다."
"그딴 종이 쪼가리가 무슨 상관이야! 지금 당장 저놈의 심장을 도려내지 않으면 이 분노는 끝나지 않아!"
아이린의 검이 레온하르트의 어깨를 스치듯 지나갔다. 얇은 옷감이 찢어지고 붉은 선이 그어졌다. 차가운 통증이 감각을 깨웠다. 레온하르트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내가 쓴 법전에 복수라는 단어는 없다. 오직 책임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 레온하르트는 찢어진 소매 사이로 드러난 룬 문자를 보였다. 푸른 빛이 감도는 그 문자는 단순한 마법의 흔적이 아니었다. 그것은 대륙의 법칙을 재정의하는 강제력이었다.
"여러분은 지금 복수를 원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을 평화를 원하는 것입니까? 사적인 제재는 또 다른 폭정의 시작일 뿐입니다."
군중 속에서 웅성거림이 시작되었다. 곡괭이를 든 농부들의 손에 힘이 빠졌다. 아이린은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검을 쥔 손에 핏줄이 돋았다.
"너는 항상 그런 식이지. 법, 논리, 이성. 네 가슴 속엔 심장 대신 법전이 들어 있는 거냐?"
아이린이 검을 거칠게 바닥에 박았다. 불꽃이 튀며 돌바닥이 깨져 나갔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흐느끼기 시작했다. 기사들도 하나둘 무기를 내렸다. 하지만 그들의 눈빛에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응어리가 남아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손등의 통증은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렬하게 타올랐다. 룬 문자가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렸다. 그는 고개를 돌려 등 뒤의 고룡 발락을 보았다.
발락은 인간들의 소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만한 용의 눈빛은 온데간데없었다. 깊은 심연 같은 눈동자에는 알 수 없는 연민과 조소가 섞여 있었다. 발락은 인간들의 위협에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레온하르트의 발치를 뚫어지게 바라볼 뿐이었다.
"어리석은 아이여."
발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입을 통해 나오는 소리가 아니었다. 뇌를 직접 울리는 언령의 잔재였다. 레온하르트의 고막이 징징거리는 진동을 일으켰다.
"너희가 믿는 그 법이 정말로 구원이 될 거라 생각하느냐?"
발락이 나직이 읊조렸다. 주변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레온하르트는 가슴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부가 타는 듯했다.
"우리는 조약을 통해 공생을 택했다. 비록 그것이 너희에게는 굴욕이었을지라도, 그것만이 이 세계를 유지하는 유일한 장치였다."
발락의 비늘이 희미하게 떨렸다. 그 사이로 붉은 기운이 스며 나왔다. 레온하르트는 직감했다. 자신이 조약을 찢어버린 순간, 무언가 돌이킬 수 없는 장치가 해제되었음을. 500년 전의 평화 조약은 단순한 굴욕의 기록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대한 재앙을 가두는 봉인이기도 했다.
"너의 아버지가 했던 것과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구나, 법의 아들이여."
발락의 눈동자가 기괴하게 번뜩였다. 레온하르트의 머릿속에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법전 속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가던 모습. 아버지는 죽기 직전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왜 그는 조약의 진실을 숨기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만 했을까.
레온하르트의 시야가 흔들렸다. 광장의 소음이 멀어지고, 오직 발락의 낮은 목소리만이 귓전을 때렸다. 손등의 룬 문자가 기괴하게 비틀리며 새로운 문장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인간의 언어가 아니었다. 고대 룬어 분석법으로도 해석할 수 없는, 저 너머의 언어였다.
발락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 그가 올 것이다. 조약의 수호자가 사라진 자리를 채우러."
광장의 돌바닥이 비명을 지르며 뒤틀리기 시작했다. 먼 하늘에서 에테르 폭풍이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자연적인 기상 현상이 아니었다. 차원이 찢어지며 발생하는 거대한 마나의 소용돌이였다. 아델가드의 성벽을 지탱하던 대공 방어진이 일제히 붉은빛을 내뿜으며 과부하를 일으켰다.
"에라스무스! 마나 측정치가 어떻게 되나!"
레온하르트가 소리쳤다. 군중 뒤편에서 콧수염을 꼬며 유물을 만지작거리던 에라스무스가 비틀거리며 달려왔다. 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손에 든 측정용 마나석이 검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측정 불능입니다! 이건 9서클 마법도, 드래곤의 언령도 아니에요! 세계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에라스무스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레온하르트의 팔에 새겨진 룬 문자를 보더니 헉 하며 숨을 들이켰다. 그의 시선이 레온하르트의 눈과 마주쳤다. 그 안에는 경악과 함께 기묘한 깨달음이 서려 있었다.
"레온하르트, 자네 팔에 있는 그 문양... 500년 전 기록되지 않은 시간에 나타났던 그 상징이네."
그 순간 지면이 폭발하듯 솟구쳤다. 광장 중앙에 거대한 균열이 생기며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환호하던 시민들은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아이린은 본능적으로 검을 다시 쥐고 레온하르트의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그녀의 검끝은 보이지 않는 압력에 눌려 땅으로 고꾸라졌다.
연기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서서히 형체를 드러냈다. 그것은 드래곤도, 인간도 아니었다. 기괴한 갑옷을 입은 채 반투명한 육신을 지닌 존재였다. 그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주변의 마나가 흡수되어 사라졌다. 발락조차 그 존재를 보자 거대한 몸집을 움츠리며 고개를 숙였다.
"수호자가 조약을 파기했다."
그림자의 목소리가 광장 전체에 공명했다. 그것은 소리라기보다 파동에 가까웠다. 레온하르트는 귀에서 흐르는 선혈을 닦아낼 여유도 없이 법전을 움켜쥐었다. 그는 떨리는 다리를 지탱하며 한 걸음 나아갔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어떤 법적 권한으로 이곳에 개입하는 것입니까?"
레온하르트의 질문에 그림자가 고개를 돌렸다.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공허한 어둠만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가 손을 뻗자 허공에 거대한 빛의 두루마리가 나타났다. 그것은 레온하르트가 방금 찢어버린 평화 조약의 원본이었다. 아니, 그것은 원본이 아니라 조약이 숨기고 있던 진정한 계약서였다.
"나는 법의 집행자. 계약의 파기를 확인하러 왔다."
그림자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레온하르트를 덮쳤다. 아이린이 소리를 지르며 뛰어들었지만, 그녀의 몸은 허공에서 튕겨 나가 벽에 처박혔다. 레온하르트는 눈을 감지 않았다. 그는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자신의 손등에 새겨진 룬이 그 빛과 공명하는 것을 느꼈다.
아버지가 죽기 전 남겼던 마지막 유언이 뇌리를 스쳤다.
'법은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가두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빛이 광장을 집어삼켰다. 모든 소리가 사라진 침묵 속에서 레온하르트는 보았다. 아델가드 지하 깊숙한 곳, 오백 년 동안 잠들어 있던 거대한 기계 장치가 돌아가는 것을. 그리고 그 장치의 중심에 자신의 가문, 아스텔의 문장이 새겨져 있음을.
정신을 차렸을 때, 광장은 이전과 다른 풍경이었다. 하늘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도시는 공간이 왜곡되어 기하학적으로 뒤틀려 있었다. 시민들은 돌처럼 굳어 있었고, 유일하게 움직이는 것은 레온하르트와 그의 앞에 선 집행자뿐이었다.
"계약 위반의 대가는 대륙의 소멸이다."
집행자가 거대한 검을 뽑아 들었다. 그 검은 오리하르콘도, 드래곤의 피로 제련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순수한 언령 그 자체로 이루어진 칼날이었다. 레온하르트는 품 안의 법전을 펼쳤다. 종이들이 바스라지며 허공으로 흩어졌다.
"아직 변론의 기회가 남았습니다."
그는 피 섞인 침을 뱉으며 안경을 벗어 던졌다. 맨눈으로 마주한 세계는 마나의 흐름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생명력을 제물로 삼아 손등의 룬을 강제로 활성화했다. 푸른 불꽃이 그의 팔을 타고 올라와 전신을 감쌌다.
"이 조약에는 명시되지 않은 숨은 조항이 있습니다. 제3자 개입 시, 모든 계약은 원점으로 회귀한다는 조항 말입니다."
집행자의 움직임이 멈췄다. 어둠 속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레온하르트는 비틀거리며 검은 칼날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자신의 심장을 가리키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베어 보십시오. 그 순간 당신의 존재 근거인 조약 자체가 소멸할 테니까."
집행자의 검이 레온하르트의 가슴팍에서 멈췄다. 칼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늘한 기운이 살을 에는 듯했다. 주변의 왜곡된 공간이 비명을 지르며 요동쳤다. 레온하르트는 숨을 멈추고 집행자의 대답을 기다렸다.
"교활한 인간이군. 아스텔의 핏줄답다."
집행자가 검을 거두며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이 레온하르트의 이마에 닿았다. 거대한 정보의 파도가 그의 뇌를 덮쳤다. 500년 전의 진실, 아버지가 숨겨야 했던 공포, 그리고 인간이 드래곤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던 진짜 이유가 펼쳐졌다.
레온하르트의 눈에서 붉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바닥에 주저앉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집행자의 형체가 흐릿해지며 사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낙인처럼 레온하르트의 영혼에 새겨졌다.
"기한을 주마. 조약의 진정한 원본을 찾아라. 그렇지 않으면 다음번엔 변론의 기회조차 없을 것이다."
빛이 사라지고 광장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다시 들려왔고, 무너진 성벽의 잔해가 바닥을 쳤다. 아이린이 달려와 레온하르트의 어깨를 붙잡았다.
"레온하르트! 괜찮아? 방금 그건 대체 뭐였어?"
그녀의 목소리가 멀게 느껴졌다. 레온하르트는 텅 빈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룬 문자는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검은 흉터가 남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멀리 보이는 심장부 산맥을 바라보았다. 그곳, 천공의 둥지 너머에 아버지가 숨긴 진실이 있었다.
"아이린 경, 검을 챙기십시오."
레온하르트가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먼지를 털어내며 천천히 일어섰다.
"이제부터 우리는 법이 아닌, 법의 뒤편을 쫓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