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탑 중심부는 비명 지르는 마나의 소용돌이로 가득했다. 허공에 떠 있는 500년 전의 조약 원본이 금색 광휘를 내뿜으며 부르르 떨렸다. 레온하르트의 오른팔에 새겨진 고대 룬 문자가 그 빛에 반응하며 살을 태우는 듯한 열기를 뿜어냈다. 가죽 장갑 너머로 번지는 푸른 연기가 코끝을 찔렀다. 탑 외벽 너머에서는 드래곤 군단의 포효와 자유 기사단의 함성이 뒤섞여 거대한 해일처럼 밀려들고 있었다. 진동이 발바닥을 타고 올라와 척추를 타고 뇌리를 흔들었다.
레온하르트는 안경테를 손가락 끝으로 밀어 올렸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그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눈앞의 양피지는 단순한 종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인류의 목을 죄어온 거대한 쇠사슬이자, 동시에 용들을 가두기 위해 설계된 정교한 감옥이었다. 룬 문자의 배열을 훑어 내려가던 레온하르트의 입술이 굳게 닫혔다. 조약 제1조 4항의 이면에 숨겨진 왜곡된 마나 흐름이 보였다.
"이것이 당신들이 말한 평화의 실체였나."
나직한 목소리가 허공에 흩어졌다. 양피지에서 뻗어 나온 마력의 실타래가 그의 팔을 감싸 쥐었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에테르가 역류하며 심장을 쥐어짜는 감각이 전해졌다. 레온하르트는 숨을 들이켰다. 폐부 깊숙이 박히는 차가운 공기가 오히려 정신을 맑게 깨웠다. 그는 아티팩트가 박힌 왼손을 뻗어 조약 원본의 중심부를 움켜쥐었다.
콰앙.
탑의 출입문이 박살 나며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먼지 구름 사이로 대재상 카엘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화려한 법복은 이미 갈기갈기 찢겨 있었고, 얼굴에는 광기에 가까운 희열과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 카엘은 비틀거리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지팡이 끝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언령이 레온하르트의 발치를 타격했다.
"그 손 치워. 그건 인간이 만질 수 있는 게 아니야."
카엘의 목소리가 쇳소리를 내며 긁혔다. 그는 드래곤의 언령을 흉내 내려는 듯 혀를 기괴하게 굴렸다. 입가에 고인 침이 턱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오직 허공의 양피지만을 바라보는 그의 눈에 탐욕이 이글거렸다.
레온하르트는 고개를 돌려 카엘을 응시했다. 무감각한 시선이 카엘의 심장을 꿰뚫는 듯했다.
"카엘 폰 아델가드. 당신은 법을 수호하는 자가 아니라, 법의 그늘에 숨은 기생충에 불과해."
"닥쳐라. 용의 위엄 앞에 무릎 꿇지 않는 미개한 것들이 감히."
카엘이 다시 주문을 외우려 할 때였다. 탑의 창문을 깨고 거대한 적룡의 머리가 들이닥쳤다. 발락이었다. 붉은 비늘이 마찰하며 소름 끼치는 금속음을 냈다. 발락의 황금빛 눈동자가 레온하르트를 향해 고정되었다. 용의 숨결이 닿는 곳마다 석재 바닥이 녹아내리며 유독한 증기를 내뿜었다.
그 순간, 그림자 속에서 아이린이 튀어나왔다. 그녀의 손에는 오리하르콘과 드래곤의 피를 배합해 제련한 성검이 쥐어져 있었다. 아이린은 거침없이 도약했다. 공중에서 회전하며 검기를 내뿜는 그녀의 동작은 한 마리의 매처럼 날카로웠다.
"스승님의 몫이다."
아이린의 외침과 함께 성검이 발락의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용의 비늘이 부서지며 뜨거운 피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발락은 고통스러운 포효를 내지르며 탑 전체를 휘저었다. 무너져 내리는 천장 잔해를 피하며 에라스무스가 레온하르트 곁으로 다가왔다. 그는 콧수염을 거칠게 꼬며 품 안에서 복잡한 기계 장치를 꺼냈다.
"레온하르트, 시간이 없네. 이 장치가 마나 역류를 잠시 억제해 줄 걸세. 하지만 3분뿐이야."
에라스무스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의 눈에는 학구적인 호기심보다 친구를 향한 걱정이 앞서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약 원본의 진동은 이제 탑 전체를 무너뜨릴 기세로 거세졌다.
레온하르트는 다시 양피지에 집중했다. 500년 전, 인류의 영웅 에드윈이 남긴 마지막 한 문장이 보였다. 그것은 조약의 파기가 아니라, 관리자의 피로 완성되는 봉인의 열쇠였다. 만약 그가 지금 이 룬을 가동한다면, 대륙의 모든 드래곤은 언령을 잃고 평범한 짐승으로 전락할 것이다. 하지만 그 대가로 레온하르트 자신의 생명력 또한 조약의 제물로 바쳐져야 했다.
반면, 새로운 룬을 써 내려간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것은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이었다. 용과 인간이 법이라는 틀 안에서 대등하게 서는 세상. 드래곤의 본능을 억누르고 인간의 공포를 씻어내는 새로운 계약. 레온하르트의 머릿속에서 수천 가지 법리적 해석과 결과가 스쳐 지나갔다.
"레온하르트. 어서 결정해."
아이린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발락의 꼬리에 휘말려 벽에 부딪히면서도 검을 놓지 않았다. 카엘은 그 틈을 타 제어 장치를 향해 몸을 날렸다.
"전부 파괴하겠다. 내가 가질 수 없다면 누구도 가질 수 없어."
카엘의 지팡이가 제어 구슬을 타격하기 직전, 레온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작았으나 탑 안의 모든 소음을 잠재울 만큼 명료했다.
"우리는 노예도, 사냥감도 아니다. 오늘부터 법은 오직 살아있는 자들의 의지만을 기록한다."
레온하르트의 오른팔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 불꽃이 양피지를 감쌌다. 그는 조약 원본을 두 손으로 거칠게 쥐었다. 종이가 찢어지는 소리가 아니라, 거대한 사슬이 끊어지는 듯한 굉음이 탑 내부를 진동시켰다.
찌익.
조약 원본이 반으로 갈라졌다. 그 틈새로 500년 동안 응축되었던 에테르가 폭발적으로 쏟아져 나왔다. 레온하르트는 고통에 신음하는 대신, 피 묻은 손가락으로 허공에 새로운 룬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고대 룬어 분석법을 통해 재정의된 세상의 법칙들이 그의 손끝에서 실체화되었다.
카엘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떴다. 그가 신봉하던 드래곤의 마력이 그를 거부하며 밖으로 밀어냈다. 발락의 거대한 신체도 힘을 잃고 탑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하늘을 뒤덮었던 붉은 구름이 걷히고, 그 사이로 투명한 빛이 쏟아져 내렸다.
레온하르트의 등 뒤로 거대한 검은 날개가 돋아났다. 그것은 드래곤의 것도, 천사의 것도 아니었다. 법을 수호하기 위해 스스로 괴물이 되기를 선택한 자의 낙인이었다. 아이린은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검을 쥔 그녀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탑 외벽이 완전히 무너져 내리며 아델가드의 전경이 드러났다. 지평선 끝까지 늘어서 있던 드래곤들이 하나둘 지상으로 내려앉았다. 그들은 더 이상 포효하지 않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게에 짓눌린 듯, 거대한 날개를 접고 무릎을 꿇었다. 인간 기사들은 검을 든 채 그 기묘한 광경을 지켜보았다.
에테르 폭풍이 걷힌 자리에는 서늘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레온하르트는 숨을 몰아쉬며 찢어진 조약 조각을 바닥에 던졌다.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용의 그것처럼 세로로 찢어져 있었지만, 그 안에는 인간의 이성이 빛나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안경을 벗었다. 금이 간 렌즈 너머로 비치던 일그러진 세상은 이제 없었다. 지평선 너머에서 붉은 태양이 고개를 내밀며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알렸다.
"끝났어."
아이린이 다가와 그의 어깨를 잡았다. 그녀의 손은 따뜻했고, 검 손잡이를 두드리던 불안한 습관은 사라져 있었다. 에라스무스는 콧수염을 매만지며 무너진 잔해 사이에서 연신 감탄사를 내뱉었다.
레온하르트는 멀리 보이는 아델가드 성벽을 바라보았다. 성벽 위에서 환호하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전해졌다. 이제 용의 혈세를 바칠 필요도, 마법 제한법에 떨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가슴 한구석에는 차가운 구멍이 뚫린 듯한 감각이 남아 있었다.
그때, 등 뒤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완전히 소멸한 줄 알았던 카엘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의 눈은 이미 초점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카엘은 자신의 가슴팍을 움켜쥐고 레온하르트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너는... 너는 이겼다고 생각하나?"
카엘의 목소리에는 저주보다 더 깊은 조소가 담겨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응시했다.
"조약은 파기되었다. 당신의 권력도, 드래곤의 위엄도 이제는 법전 속의 낡은 기록일 뿐이야."
"아니, 아니지. 레온하르트 반 아스텔. 너는 아버지가 왜 죽었는지 끝까지 이해하지 못했어."
카엘이 피 섞인 가래를 내뱉으며 킥킥거렸다. 그는 자신의 품속에서 낡은 가죽 주머니 하나를 꺼내 바닥에 던졌다. 주머니가 터지며 그 안에서 낡은 인장 하나가 굴러 나왔다. 아스텔 가문의 인장이었다. 하지만 그 문양은 레온하르트가 알고 있는 것과 미묘하게 달랐다.
인장의 중심부에는 용의 심장을 찌르는 검이 아니라, 용과 인간의 심장이 하나의 사슬로 연결된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레온하르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버지는 조약을 파기하려다 죽은 게 아니야. 그는 조약의 '진짜 내용'을 숨기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거다."
카엘의 신형이 서서히 흐릿해졌다. 그의 몸이 검은 재로 변해 바람에 흩날리기 시작했다. 레온하르트는 급히 손을 뻗었지만, 잡히는 것은 차가운 공기뿐이었다.
"이제 네가 쓴 그 새로운 룬이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될지... 똑똑히 지켜봐라. 너는 방금 이 세상을 더 큰 지옥으로 인도했으니까."
카엘의 마지막 말과 함께 그의 존재는 완전히 사라졌다. 레온하르트는 바닥에 떨어진 인장을 집어 들었다. 인장에 손이 닿는 순간, 그의 오른팔에 새겨진 룬 문자가 일제히 붉은 빛을 내뿜으며 전신을 타격했다.
커헉.
레온하르트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심장이 터질 듯한 고동과 함께 뇌리에 낯선 기억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것은 500년 전의 기록이 아니었다. 아주 먼 미래, 혹은 완전히 다른 차원에서 온 듯한 이질적인 환영이었다.
그곳에서 레온하르트는 보았다. 무릎 꿇은 드래곤들의 등 뒤에서 솟아오르는, 용보다 더 거대하고 끔찍한 '무언가'를.
"레온하르트! 왜 그래?"
아이린이 그의 몸을 흔들었다. 하지만 레온하르트의 시선은 허공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떨리는 입술을 열어 나직하게 읊조렸다.
"이건... 새로운 계약이 아니야."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방금 자신이 쓴 룬 문자가 기괴하게 뒤틀리며 새로운 문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것은 법이 아니라, 일종의 '초대장'이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드래곤들이 무릎을 꿇은 것은 레온하르트의 힘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은 대륙 너머에서 다가오는 거대한 공포를 감지하고, 포식자 앞에 엎드린 먹잇감처럼 굴복한 것이었다.
레온하르트는 찢어진 안경을 다시 집어 들었다. 그리고 옆에 선 아이린을 향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아이린, 검을 다시 잡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