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가 뺨을 타고 뇌수까지 스몄다.
입안에는 비릿한 금속 맛이 가득했다.
레온하르트의 시야가 붉은 점들로 뒤덮여 일렁였다.
흐릿한 시선 끝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구두가 다가왔다.
아델가드의 수도원 광장을 채운 돌들이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구두의 주인은 멈춰 서서 가느다란 비웃음을 흘렸다.
대재상 카엘 폰 아델가드였다.
그는 품 안에서 붉게 빛나는 비늘 하나를 꺼냈다.
용의 비늘이었다.
표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력이 주변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가슴팍이 으스러질 것 같은 중압감이 전신을 덮쳤다.
카엘은 그것을 보석처럼 소중하게 어루만졌다.
손가락 끝이 비늘의 날카로운 모서리를 훑고 지나갔다.
그의 눈에는 광기 섞인 환희가 서려 있었다.
카엘이 허리를 숙여 레온하르트의 귓가에 속삭였다.
평화 조약 제17조 4항을 기억하나.
그의 목소리는 뱀처럼 축축하게 고막을 파고들었다.
용의 비늘을 소지한 자는 그 즉시 용의 대리인으로 간주한다.
레온하르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턱 근육이 경직되어 치아가 맞물리는 소리가 났다.
대리인에 대한 공격은 곧 용에 대한 선전포고다.
카엘은 비늘을 높이 치켜들며 주변의 병사들을 훑었다.
광장에 모인 시민들의 숨소리가 한꺼번에 잦아들었다.
이 반역자는 법을 어기고 용의 권능에 도전했다.
따라서 본 대재상은 즉결 처분권을 행사하겠다.
그는 허리춤에서 은색 단검을 뽑아 들었다.
단검 끝이 레온하르트의 목을 향해 느릿하게 내려왔다.
금속의 서늘함이 피부에 닿으려던 찰나였다.
저기,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경박하면서도 명징한 목소리가 광장에 울려 퍼졌다.
에라스무스가 콧수염을 꼬며 인파 사이로 걸어 나왔다.
그의 손에는 기괴하게 뒤틀린 마력 측정기가 들려 있었다.
구리 전선이 삐져나온 기계가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 비늘, 색깔이 좀 묘하지 않습니까.
에라스무스가 기계의 렌즈를 카엘의 비늘에 조준했다.
카엘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이 미친 노인네가 죽고 싶은 모양이군.
카엘의 일갈에도 에라스무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측정기 뒷면의 다이얼을 요란하게 돌려댔다.
진짜 발락의 비늘이라면 순도가 98%는 나와야 하거든요.
기계에서 날카로운 경고음이 터져 나왔다.
그런데 이건 마나 반응이 전혀 없네요.
에라스무스가 렌즈 너머로 눈을 가늘게 뜨며 덧붙였다.
그냥 오리하르콘에 붉은 칠을 한 모조품 아닙니까.
광장에 모인 시민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번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의심으로 가득 차 카엘을 향했다.
카엘의 얼굴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단검을 쥔 그의 손등에 핏줄이 툭 불거졌다.
닥쳐라, 이 이단 마법사 놈이 감히.
그가 명령을 내리기도 전에 금속음이 대기를 갈랐다.
챙.
아이린이 검을 뽑아 들고 호위병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그녀의 검끝이 호선을 그리며 병사들의 방패를 타격했다.
아이린은 검 손잡이를 거칠게 두드리며 길을 열었다.
강철과 강철이 부딪치며 불꽃이 허공을 수놓았다.
레온하르트, 정신 차려.
그녀의 외침이 천둥처럼 머릿속을 때렸다.
레온하르트는 억지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손톱이 바닥을 긁으며 불쾌한 소리를 냈다.
바닥에 고인 자신의 피를 찍어 룬을 그리기 시작했다.
손가락 끝이 타 들어가는 통증이 전신을 훑었다.
혈관 속의 마나가 역류하며 장기를 쥐어짰다.
그는 입술을 짓이기며 의식을 집중했다.
정통 마법으로는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없었다.
법의 허점을 메우는 것은 더 큰 상위의 법뿐이다.
그는 500년 전의 기억을 더듬어 고대 룬어를 나열했다.
대뇌를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충격이 반복되었다.
시야가 암전되었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그는 흐릿한 정신줄을 붙잡고 마지막 룬을 완성했다.
금기된 마법인 정신 각인의 술식이 발동했다.
그의 눈동자가 기괴한 보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레온하르트의 입술이 미세하게 달싹였다.
가짜 비늘로 숨을 수 있는 법은 없다.
그의 목소리가 마력을 타고 광장 전체로 퍼져 나갔다.
사람들의 눈동자가 일제히 초점을 잃고 멍해졌다.
진실은 이미 만인의 머릿속에 새겨졌다.
광장에 모인 수만 명의 뇌리에 지도가 그려졌다.
아델가드 북쪽, 안개에 가려진 침묵의 협곡 너머.
그곳에 우뚝 솟은 거대한 석탑의 좌표가 강제로 박혔다.
시간의 탑이었다.
500년 동안 잊혔던 역사의 진실이 그들의 의식을 잠식했다.
사람들의 호흡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 먼저 발을 뗐다.
저기다, 저기에 조약의 원본이 있다.
그 외침은 산불처럼 번져 광장을 집어삼켰다.
시민들이 카엘과 병사들을 밀쳐내며 북쪽을 향했다.
그들의 눈에는 광기 어린 갈망이 서려 있었다.
카엘은 자신의 권위가 무너지는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비늘을 쥔 그의 손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안 돼, 멈춰라, 이것들은 다 환상이다.
카엘의 절규는 군중의 발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가짜 비늘을 허망하게 거두어들였다.
레온하르트는 비틀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오른팔의 각인이 검게 타오르며 연기를 내뿜었다.
그는 안경테를 밀어 올리려 했으나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에라스무스가 급히 다가와 그의 어깨를 부축했다.
자네, 방금 무슨 짓을 한 건지 아나.
에라스무스의 목소리에 전례 없는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환각 마법이 아니었다.
세상의 법칙을 강제로 수정하는 언령의 모사였다.
레온하르트는 대답 대신 멀리 보이는 탑을 응시했다.
탑 꼭대기에서 푸른 불꽃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거대한 빛의 기둥이 되어 하늘을 꿰뚫었다.
쿠르릉.
지면이 거대하게 진동하며 성벽의 돌들이 비명을 질렀다.
대기 중의 마나 농도가 급격히 희박해졌다.
마법사들이 가슴을 움켜쥐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에라스무스의 수염 끝이 파르르 떨렸다.
탑이 마나를 빨아들이고 있어.
그것은 탑이 아니라 거대한 억제 장치였다.
아스테리아 전역의 힘의 균형이 무너지고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피 섞인 웃음을 흘리며 카엘을 보았다.
카엘의 얼굴은 이미 공포로 인해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이제 아무런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빛의 기둥은 더욱 굵어지며 구름을 찢어 발겼다.
그 여파로 발생한 충격파가 광장을 휩쓸었다.
레온하르트는 품 안에서 낡은 법전 하나를 꺼냈다.
그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광장의 대리석 바닥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성벽 너머 드라코니아 고원에서 거대한 포효가 들렸다.
용들이 조약의 균열을 감지하고 깨어난 증거였다.
아이린이 피 묻은 검을 갈무리하며 레온하르트 곁에 섰다.
그녀의 어깨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들썩였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레온하르트.
아이린의 목소리에 날 선 긴장이 섞여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대답 대신 품 안의 법전을 꽉 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검은 재가 흩날렸다.
법령 제1조, 모든 계약은 진실에 기반해야 한다.
그는 갈라진 목소리로 나직하게 읊조렸다.
에라스무스는 기계의 다이얼을 멈추고 탑을 보았다.
저 빛이 꺼지면 대륙의 마나는 완전히 사라질 걸세.
그의 눈에 호기심 대신 깊은 근심이 차올랐다.
레온하르트는 멈추지 않고 북쪽을 향해 걸었다.
구두 밑창이 깨진 돌 조각을 밟으며 으스러졌다.
카엘은 멀어지는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비명을 질렀다.
네놈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는 거냐.
카엘의 목소리는 이미 권위를 잃고 갈라져 있었다.
용들이 내려오면 아델가드는 잿더미가 될 것이다.
레온하르트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고개만 약간 돌렸다.
비늘을 잃은 대재상의 꼴이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시선이 카엘의 떨리는 손에 머물렀다.
거짓된 조약으로 쌓아 올린 평화는 여기까지다.
레온하르트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광장을 메웠다.
하늘을 찌르던 빛의 기둥이 황금색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500년 전 잊혔던 성검의 광채와 닮아 있었다.
광장에 남겨진 시민들이 그 빛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그들의 눈에는 두려움과 희망이 기묘하게 섞여 있었다.
에라스무스가 콧수염을 거칠게 꼬며 뒤를 따랐다.
이거 참, 내 연구 인생에서 가장 위험한 실험이 되겠군.
그는 투덜대면서도 측정기의 전원을 다시 올렸다.
기계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의 파동이 레온하르트를 감쌌다.
아이린은 검 손잡이를 툭툭 치며 앞장을 섰다.
용들이 오기 전에 탑에 도착해야 해.
그녀의 눈에 서린 결의가 황금빛을 받아 번뜩였다.
멀리 협곡 너머에서 검은 그림자들이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드래곤들의 날갯짓이 대기를 찢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델가드의 대공 방어진이 비명을 지르며 과부하를 일으켰다.
성벽의 마력석들이 하나둘씩 빛을 잃고 부서졌다.
레온하르트는 안경을 벗어 주머니에 넣었다.
이제 법전의 글귀가 아닌 현상을 마주할 차례였다.
그는 자신의 팔에 새겨진 룬이 고동치는 것을 느꼈다.
피부 아래에서 무언가 살아 움직이는 듯한 감각이었다.
그것은 용의 언령도, 인간의 마법도 아니었다.
세계를 재구성하는 태초의 문자가 맥동하고 있었다.
레온하르트의 발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광장을 벗어난 군중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들은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북쪽으로 향했다.
카엘은 바닥을 기며 흩어진 가짜 비늘 조각을 모았다.
그의 손끝이 깨진 단면에 긁혀 핏방울이 맺혔다.
이건 내 거야, 내 권력이라고.
그의 중얼거림은 불어오는 에테르 폭풍에 흩어졌다.
하늘은 이제 붉은색과 황금색이 뒤섞인 혼돈의 빛깔이었다.
레온하르트는 탑 입구에 도달하여 거대한 석문을 마주했다.
문 위에는 읽을 수 없는 고대 문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피 묻은 손을 문 중앙의 홈에 갖다 댔다.
지이잉.
석문이 진동하며 깊은 저음의 소리를 내뱉었다.
레온하르트의 몸이 눈부신 빛에 휩싸여 사라졌다.
눈을 뜬 곳은 끝을 알 수 없는 계단의 시작점이었다.
나선형으로 이어진 계단은 구름 위까지 뻗어 있었다.
공기는 차갑고 건조했으며 정적만이 감돌았다.
레온하르트는 한 계단씩 발을 내디뎠다.
심장 박동이 고막을 두드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얼마나 올랐을까, 거대한 거울이 앞을 가로막았다.
거울 속에는 레온하르트의 모습이 아닌 다른 남자가 서 있었다.
금색 갑옷을 입고 용의 심장을 겨눈 영웅의 모습이었다.
남자가 입술을 움직여 무언가 말을 건넸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레온하르트는 그 뜻을 이해했다.
조약의 대가는 영혼의 구속이다.
레온하르트는 거울 속의 자신을 빤히 응시했다.
그는 품 안의 법전을 꺼내 거울 앞에 내려놓았다.
법은 구속이 아닌 질서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
그의 선언과 동시에 거울에 미세한 금이 가기 시작했다.
유리 조각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거울 너머로 푸른 구슬이 공중에 떠 있는 방이 나타났다.
그것이 바로 아스테리아의 마나를 통제하는 핵심 장치였다.
구슬 표면에는 수천 개의 법 조항이 실선처럼 얽혀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주저 없이 구슬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이 구슬에 닿는 순간, 전신이 경직되었다.
수백 년간 쌓인 인간들의 원망과 용의 위압이 쏟아져 들어왔다.
으윽.
그는 이를 악물며 고통을 견뎌냈다.
눈앞에 500년 전의 진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인간 영웅이 용을 봉인하기 위해 스스로를 제물로 바친 순간.
조약은 평화의 약속이 아닌 거대한 감옥의 자물쇠였다.
레온하르트의 눈에서 붉은 피가 한 방울 흘러내렸다.
그는 구슬 속에 새겨진 자신의 이름을 발견했다.
아스텔 가문의 후계자이자 조약의 최종 관리자.
그의 아버지가 죽어야만 했던 이유가 그곳에 적혀 있었다.
레온하르트는 떨리는 손으로 구슬의 중심부를 쥐었다.
구슬 속의 법 조항들이 그의 피부를 파고들며 각인되었다.
아아악.
찢어지는 비명이 탑 내부를 가득 채웠다.
아이린과 에라스무스가 탑 아래에서 그 소리를 듣고 멈춰 섰다.
하늘을 가로지르던 빛의 기둥이 일순간 검게 변했다.
용들의 포효가 비명으로 바뀌며 대지가 뒤흔들렸다.
레온하르트의 의식이 서서히 흐려졌다.
그는 마지막 남은 이성으로 구슬을 비틀어 돌렸다.
제한 해제.
그의 한마디에 탑 전체가 거대한 폭발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먼지 구름이 아델가드 전체를 뒤덮어 시야를 가렸다.
정적이 찾아온 광장 중앙에 누군가 비틀거리며 서 있었다.
먼지를 털어내며 일어선 것은 레온하르트가 아니었다.
등 뒤에 거대한 검은 날개를 펼친 의문의 존재였다.
그 존재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계약은 파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