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락의 거대한 콧김이 광장의 대기를 단숨에 달구었다. 발치에 깔린 대리석 판들이 비명을 지르며 녹아내렸다. 끈적하게 액체가 된 돌의 열기가 장화 밑창을 타고 올라왔다. 바닥을 짚은 손바닥에서 가죽이 타는 냄새가 났다. 나는 품 안의 법전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머리 위로 드리운 그림자는 태양마저 집어삼킬 만큼 거대했다. 용의 앞발이 허공을 가르며 내려앉았다. 고막을 찢는 듯한 금속음이 광장에 울려 퍼졌다.
아이린이 던진 단검이 발락의 왼쪽 눈꺼풀 근처에서 불꽃을 튕겼다. 오리하르콘 특유의 푸른 궤적이 잔상으로 남았다. 찰나의 시선 분산이었으나 내게는 영겁과도 같은 틈이었다. 으스러진 어깨의 감각을 무시하며 몸을 굴렸다. 방금까지 내가 있던 자리는 용의 발톱에 찍혀 깊은 구덩이로 변했다.
"레온하르트! 법령을 읊을 시간이 있으면 당장 피해!"
아이린의 외침이 고막을 때렸다. 그녀는 이미 검 손잡이를 거칠게 두드리며 다음 도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맹목적인 투지만이 이글거렸다. 하지만 나는 멈출 수 없었다. 내 팔에 새겨진 고대 룬 문자가 맥박에 맞춰 검붉은 빛을 내뿜었다. 이것은 단순한 문자가 아니었다. 500년 전 인간의 피로 써 내려간 구속의 굴레였다.
발락이 고개를 쳐들었다. 놈의 목줄기부터 가슴팍까지 이어진 비늘 사이로 일렁이는 화염이 보였다. 브레스였다. 아델가드 전체를 잿더미로 만들 수 있는 절대적인 파괴의 권능이 응축되었다. 놈의 눈동자는 세로로 찢어진 채 나를 비웃었다. 인간의 법 따위는 거대한 힘 앞에 무력한 장난감에 불과하다는 오만이 그 안에 가득했다.
"미개한 것들이 감히 종이에 적힌 글자로 나를 묶으려 드느냐."
발락의 언령이 공기를 진동시켰다. 목소리만으로도 폐부가 뒤틀리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주변의 공기가 희박해지며 숨이 막혀왔다. 떨리는 손으로 법전의 마지막 장을 넘겼다. 그곳에는 일반적인 법무관들은 평생 구경조차 할 수 없는 문장이 있었다. 피로 물든 금기의 조항이 손끝에 닿았다.
피 섞인 침을 뱉어내며 소리쳤다.
"최후의 평화 조약 제1조, 상호 존중의 의무! 지배 종족의 무차별적 학살 시도는 조약의 근간을 부정하는 행위다!"
내 목소리는 용의 포효에 비하면 가냘픈 떨림에 불과했다. 그러나 내 팔의 룬 문자가 반응하기 시작했다. 공중에 떠다니던 마나의 흐름이 급격히 뒤틀렸다. 보랏빛 사슬의 형태를 갖춘 마력이 허공을 옥죄었다. 발락의 눈에 당혹감이 서렸다. 놈은 입안에 머금었던 브레스를 뱉어내려 턱을 벌렸다.
"조약 파기를 선언한다! 제1 암호, 에드윈의 눈물!"
광장 중앙에 거대한 마법 진이 떠올랐다. 그것은 빛이 아니라 어둠을 머금은 듯한 기괴한 문양이었다. 500년 전 인간 영웅 에드윈이 드래곤을 봉인하기 위해 심어두었던 자폭 기전의 첫 번째 단추였다. 발락의 가슴팍에 새겨진 낙인이 붉게 달아오르며 연기를 내뿜었다.
용의 비명이 광장을 가득 메웠다. 브레스의 기운이 역류하며 발락의 입가에서 불꽃이 터져 나왔다. 놈의 거대한 몸집이 보이지 않는 사슬에 묶인 듯 바닥으로 처박혔다. 대지가 진동하며 주변 건물의 유리창들이 일제히 박살 났다. 파편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이, 이게 무슨 일이냐!"
멀리서 지켜보던 카엘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는 자신이 신봉하던 드래곤의 권능이 인간의 법령 한 마디에 무너지는 광경을 믿지 못하는 듯했다. 카엘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습관적으로 드래곤의 언령을 흉내 내려 입술을 달싹였지만, 공포에 질려 신음조차 내뱉지 못했다.
한 걸음씩 발락을 향해 다가갔다. 팔의 룬 문자가 살을 파고드는 듯한 통증을 유발했다. 조약 파기는 일방적인 제재가 아니었다. 그것은 시전자와 대상자의 생명력을 동일한 저울 위에 올리는 위험한 도박이었다. 시야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코끝에서 비릿한 혈향이 강해졌다.
발락은 바닥을 긁으며 저항했다. 놈의 발톱이 대리석을 종이장처럼 찢어발겼다.
"인간 주제에! 감히 내 생명을 탐하는 것이냐!"
"이것은 탐하는 것이 아니다. 정당한 법 집행일 뿐이다."
안경테를 손가락으로 밀어 올렸다. 손끝이 떨리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 애쓰며 법전의 다음 구절을 읽어 내려갔다. 한 문장 한 문장이 내 생명력을 갉아먹는 칼날이 되어 돌아왔다. 심장 부근의 마나 회로가 과부하로 인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아이린이 내 곁으로 다가와 검을 고쳐 쥐었다. 그녀의 어깨에서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레온하르트, 네 몸이 정상이 아니야. 당장 멈춰!"
"아직 끝나지 않았어. 조약 제15조, 위반자에 대한 생명 공유 조항!"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발락의 가슴에서 뻗어 나온 보랏빛 연기가 내 가슴으로 이어졌다. 놈이 느끼는 고통이 고스란히 내 신경계를 타고 전해졌다. 거대한 용의 생명력이 내 빈약한 마나 회로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명백한 폭력이었다.
발락의 움직임이 완전히 멈췄다. 놈의 거대한 눈동자에 서린 오만함은 이제 지독한 증오와 공포로 바뀌어 있었다. 놈의 비늘 색이 평소보다 훨씬 짙은 붉은색으로 변하며 주변의 열기를 빨아들였다. 이것은 놈이 가진 마지막 발악이었다.
룬 문자가 새겨진 오른팔을 들어 올려 발락의 이마를 가리켰다.
"너는 오늘 여기서 심판받는다. 대륙 아스테리아의 법에 따라."
가슴 안쪽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감각이 느껴졌다. 마나 회로가 역류하며 내장을 뒤트는 듯한 격통이 몰려왔다. 입안이 뜨거운 액체로 가득 찼다. 나는 그것을 삼키지 못하고 바닥으로 쏟아냈다. 검붉은 선혈이 녹아내린 대리석 위로 떨어져 치익 소리를 내며 기화했다.
발락의 가슴에 새겨진 낙인이 터져 나가며 눈부신 빛의 기둥이 하늘을 찔렀다. 용의 거대한 신체가 허공으로 붕 떴다가 다시 무겁게 추락했다. 놈의 눈에서 생기가 서서히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내 시야도 급격히 흐릿해졌다.
"레온하르트!"
아이린의 다급한 목소리가 멀게만 느껴졌다. 무릎에 힘이 풀려 바닥으로 쓰러졌다. 법전이 손에서 빠져나가 바닥을 굴렀다. 심장이 터질 듯이 박동하며 온몸의 감각을 마비시켰다. 조약의 대가는 가혹했다. 용의 힘을 묶은 사슬은, 내 생명줄마저 함께 조여오고 있었다.
떨리는 손을 뻗어 바닥에 떨어진 법전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손가락 끝은 허공만을 휘저을 뿐이었다. 발락의 마지막 단명이 내 팔의 룬 문자를 타고 심장을 향해 쇄도했다. 뜨거운 피가 다시 한번 목구멍을 타고 역류했다.
고개를 돌려 멀리 서 있는 카엘을 보았다. 그는 공포에 질린 채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그 뒤로 아델가드의 성벽 너머, 천공의 둥지에서 들려오는 수많은 용의 포효가 대륙을 뒤흔들었다. 조약의 균열을 감지한 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와중에도 나는 룬 문자가 새겨진 내 팔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가 내 몸을 감싸 안고 있었다. 뜨거운 열기가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몸 안의 뼈들이 제자리를 찾아 비틀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린의 외침을 뒤로한 채 차가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내 피로 얼룩진 법전의 한 페이지였다. 그곳에는 500년 전 아버지가 남긴 듯한 작은 메모가 적혀 있었다. 법은 양날의 검이라는 익숙한 문장이 시야에서 흩어졌다.
발락의 가슴에서 뿜어져 나온 보랏빛 불꽃이 내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의식은 깊은 심연 속으로 가라앉았다. 그 순간, 내 귓가에 낯설고 거대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계약자가 바뀌었군."
대답하지 못한 채 정신을 잃었다. 내 팔의 룬 문자가 마지막으로 강렬한 빛을 발산하며 나의 심장 회로를 강제로 재배열하기 시작했다.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고통 속에서, 나의 신체는 인간의 영역을 벗어나고 있었다.
먼지 구름 너머에서 에라스무스가 달려오는 환영이 보였다. 그는 콧수염을 바르르 떨며 내 팔의 문자를 가리켰다. 그의 입술이 무언가 경악스러운 사실을 말하려는 듯 움직였다. 하지만 그 소리는 내게 닿지 않았다.
광장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발락의 시체에서 흘러나온 마나가 내 몸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것은 정화되지 않은 순수 정수였다. 마나 회로가 팽창하다 못해 찢어지는 감각에 몸이 뒤틀렸다. 손톱이 대리석 바닥을 긁어 깊은 자국을 남겼다.
"레온하르트! 눈 떠! 제발!"
아이린이 내 어깨를 흔들었다. 그녀의 눈물이 뺨에 떨어졌으나 그 온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내 피부는 이제 인간의 것이라기엔 너무나 차갑고 딱딱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것은 피가 아니었다. 그것은 용의 언령이 섞인 농축된 마력이었다.
카엘은 이 광경을 보며 실성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지팡이를 내던지고 광장 한복판에 주저앉았다. 하늘에서는 용들의 거대한 날갯짓 소리가 폭풍처럼 밀려왔다. 아델가드의 대공 방어진이 무색하게도, 그들은 조약의 파괴자를 처단하기 위해 지상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나는 감긴 눈꺼풀 너머로 보았다. 500년 전 에드윈 대제가 마주했던 진실을. 법전의 마지막 장, 찢어진 틈새 사이로 숨겨진 문구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것은 구원이 아닌 저주였다. 용을 잡기 위해 용이 되어야만 하는 가혹한 인과율이었다.
심장 박동이 멈췄다. 대신 그 자리에 거대한 마나의 핵이 자리를 잡았다. 맥박이 뛸 때마다 광장의 대기가 일렁였다. 나는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감각이 돌아온 오른손으로 내 가슴을 움켜쥐었다.
"아직이다."
내 입에서 나온 것은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발락이 썼던, 공기를 뒤트는 언령이었다. 아이린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그녀의 눈에 비친 내 모습은 더 이상 동료가 아니었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법전을 집어 들었다. 피 묻은 종이 위로 새로운 룬 문자가 새겨지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직접 써 내려가는, 이 대륙의 새로운 질서였다. 하늘을 뒤덮은 용들의 그림자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전부 내려와라. 법 집행을 시작한다."
나는 법전의 마지막 페이지를 찢어 허공으로 던졌다. 흩날리는 종이 조각들이 보랏빛 불꽃으로 변해 하늘로 치솟았다. 수천 마리의 용이 내뿜는 포효가 내 한마디에 짓눌려 침묵했다.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성벽 위로 날아오르는 첫 번째 용의 목을 향해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