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축한 이끼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아델가드 지하 감옥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차가운 냉기가 바닥에서부터 장화를 타고 올라왔다. 벽면의 틈새로 스며든 달빛이 창살의 그림자를 바닥에 길게 늘어뜨렸다. 레온하르트는 벽에 기대어 앉아 창밖의 거대한 실루엣을 응시했다. 심장부 산맥의 검은 그림자가 도시를 집어삼킬 듯 솟아 있었다. 손목을 조이는 구속구의 감촉이 거칠었다. 지난 전투의 여파로 오른팔의 각인이 간헐적으로 타올랐다. 피부 아래에서 뜨거운 열기가 맥동할 때마다 어금니를 꽉 맞물렸다.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으나 그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이미 수천 개의 법령 조항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허공의 입자가 미세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던 벽면이 물결치듯 일렁였다. 푸른 빛의 파동이 동심원을 그리며 번지더니 그 중심에서 노신사의 형상이 툭 튀어나왔다. 에라스무스는 콧수염을 비틀며 주변을 살폈다. 그의 몸 주위로 희미한 에테르 잔영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노법사의 눈동자가 레온하르트의 초췌한 얼굴을 훑었다.
"이보게, 레온하르트. 자네 안색이 말이 아니군."
에라스무스가 품 안에서 은색 금속 장치를 꺼냈다. 복잡한 톱니와 룬 문자가 새겨진 에테르 굴절 장치였다. 그는 간수들의 발소리를 확인하듯 복도 쪽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금속 장치가 돌아가며 가느다란 기계음을 내뱉었다.
"이걸 가져오느라 내 수염이 반절은 타버릴 뻔했네."
레온하르트는 대답 대신 안경테를 밀어 올렸다. 금속 장치의 차가운 표면에 달빛이 반사되어 그의 눈동자에 맺혔다. 손을 뻗어 장치를 건네받자 손바닥을 타고 서늘한 마나가 흘러들었다. 각인의 통증이 잠시 잦아드는 기분이었다. 그는 장치의 이음매를 손가락 끝으로 더듬으며 구조를 파악했다.
"결투 재판에서 6서클 마법을 쓰겠다는 소문이 사실인가?"
에라스무스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는 레온하르트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콧수염을 거칠게 꼬았다. 노법사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이단 심문소가 자네 목을 노리게 될 걸세. 마법 제한법은 장난이 아니야."
"법은 해석의 영역입니다."
레온하르트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그는 장치의 나사를 조이며 말을 이었다. 금속 장치가 맞물리는 소리가 감옥 안에 작게 울려 퍼졌다.
"인간이 용의 언령을 이길 수 없다는 전제. 그 전제 자체가 불평등 조약의 근거입니다."
"그렇다고 스스로 사지로 걸어 들어갈 필요는 없지 않은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네. 내가 만든 전이 문으로 이곳을 빠져나가게."
에라스무스의 눈에 초조함이 서렸다. 그는 레온하르트의 어깨를 붙잡으려다 멈칫했다. 레온하르트의 시선이 너무나도 투명하고 시렸기 때문이었다. 차가운 이성이 지배하는 눈동자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도망친다면 저는 평생 범죄자로 남게 됩니다. 드래곤의 법 아래에서 말입니다."
레온하르트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구속구가 부딪히며 날카로운 금속음을 냈다. 무거운 쇠사슬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적막한 지하에 파동을 일으켰다.
"대중은 논리보다 기적에 먼저 반응합니다. 법적 정당성은 그 기적 끝에 얻어지는 결과물이죠."
"자네는 지금 법을 지키려는 건가, 아니면 스스로가 법이 되려는 건가?"
질문에 대한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감옥 밖 복도에서 거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무거운 철제 갑옷이 부딪히는 소리와 비명 소리가 뒤섞였다. 날카로운 금속음이 공기를 찢으며 벽 너머까지 진동을 전달했다. 누군가 급박하게 달려오는 발소리가 복도를 가득 채웠다.
"아이린인가."
레온하르트의 눈이 가늘어졌다. 철창 너머로 붉은 불꽃이 번쩍였다. 검날이 궤적을 그리며 공기를 가르는 파열음이 이어졌다. 에라스무스는 황급히 벽 안으로 몸을 숨기려다 다시 멈춰 섰다. 복도 모퉁이에서 사병들의 방패가 밀려드는 소리가 들렸다.
"저 친구도 제정신이 아니구먼. 대재상의 사병들을 상대로 저러다니."
아이린은 복도 입구에서 밀려드는 사병들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녀의 검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푸른 불꽃이 튀었다. 화가 치밀어 오를 때마다 검 손잡이를 두드리는 그녀의 습관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사병들의 창끝이 그녀의 갑옷을 스쳤지만 아이린은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의 어깨가 거칠게 들썩였다.
"변호사 님. 시간 없어요. 빨리 끝내요."
아이린의 외침이 지하 복도를 울렸다. 그녀의 호흡은 거칠었으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사병들이 쓰러진 자리에는 핏방울이 점점이 흩뿌려졌다. 레온하르트는 창살 사이로 그녀의 등을 바라보았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자신의 안위보다 타인의 결의를 우선하는 그 비효율적인 태도. 목 안쪽이 딱딱하게 굳는 기분이 들었다.
에라스무스는 혀를 차며 레온하르트의 팔에 새겨진 각인을 살폈다. 룬 문자가 붉게 박동하며 주변의 마나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카엘 그놈은 이미 드래곤의 노예나 다름없네. 그가 법을 휘두르는 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레온하르트가 에테르 굴절 장치를 품 안으로 갈무리했다. 차가운 금속의 질감이 가슴께에 닿았다.
"그는 공포를 숭상하죠. 드래곤의 언령에 영혼이 저당 잡힌 자의 전형적인 증상입니다."
복도의 소란이 잦아들었다. 아이린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감옥 문 앞에 섰다. 그녀의 뺨에는 옅은 찰과상이 나 있었고, 손에는 피 묻은 가죽 주머니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를 레온하르트에게 내밀었다.
"방금 처치한 놈의 소지품이에요. 문양이 예사롭지 않아서."
레온하르트가 주머니를 받아 내용물을 꺼냈다. 검은색 밀랍으로 봉인된 서신이었다. 봉인 위에는 인간의 언어가 아닌, 기괴하게 뒤틀린 날개 형상이 새겨져 있었다.
드래곤 발락의 인장이었다.
레온하르트의 손가락이 서신을 펼쳤다. 종이는 기묘한 열기를 머금고 있었다. 내용을 훑어내려가는 그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안경 너머의 눈가가 미세하게 경련했다. 손끝이 타들어가는 듯한 고열이 느껴졌으나 그는 종이를 놓지 않았다.
"이건..."
에라스무스가 옆에서 내용을 훔쳐보더니 콧수염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순식간에 가셨다. 주름진 손이 레온하르트의 소매를 꽉 붙잡았다.
서신에는 결투 재판 당일의 세부 계획이 적혀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무력 충돌에 관한 내용이 아니었다. 재판이 절정에 달하는 순간, 아델가드 전체를 제물로 바치는 대규모 의식의 설계도였다. 용의 혈세를 강제로 집행하여 도시 거주민들의 생명 정수를 한꺼번에 거두어들이겠다는 발락의 비밀 명령이었다.
카엘은 처음부터 결투의 승패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그저 드래곤이 만찬을 즐길 수 있도록 제물들을 한곳에 모으는 사냥개 역할에 불과했다.
아이린이 검 손잡이를 부서져라 움켜쥐었다. 손등의 핏줄이 불거져 나왔다.
"이 사람들을 전부 죽이겠다고요? 재판 도중에?"
레온하르트는 대답 대신 서신을 꽉 쥐었다. 종이가 구겨지며 비명을 질렀다. 그의 시선이 창밖, 어둠 속에 잠긴 도시의 불빛들을 향했다. 수만 명의 목숨이 단 한 장의 종이 위에 숫자로 기록되어 있었다. 목구멍이 바짝 말라붙는 감각이 전신으로 퍼졌다.
"재판의 규칙을 다시 써야겠군요."
레온하르트가 차가운 목소리로 뱉었다.
그는 창살 쪽으로 다가가 에테르 굴절 장치를 가동했다. 장치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 빛이 지하 감옥의 어둠을 찢었다. 복잡한 기계 장치가 회전하며 주변의 마나를 강제로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에라스무스가 당황하며 뒤로 물러났다.
"이보게. 지금 여기서 뭘 하려는 건가?"
"마법 제한법 제12조 3항. 비상사태 시 법무관은 공공의 안전을 위해 마나를 임시 수용할 권리를 가집니다."
레온하르트의 팔에 새겨진 룬 문자가 눈부시게 타올랐다. 피부가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팔 전체를 훑고 지나갔다. 그는 비명 대신 낮은 신음을 삼키며 장치를 창살에 밀착시켰다.
강철로 된 창살이 붉게 달아오르며 진흙처럼 녹아내렸다. 뜨거운 열기가 얼굴을 덮쳤지만 그는 눈을 감지 않았다. 녹아내린 쇳물이 바닥에 떨어지며 치직 소리를 냈다.
"레온하르트. 자네 팔이!"
아이린이 경악하며 외쳤다. 그의 소매가 타들어가며 그 아래에 감춰진 아티팩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대 룬어가 새겨진 금속 파편이 피부 속에 박힌 채 푸른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마나 회로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힘이 아니었다.
레온하르트의 코에서 붉은 피가 한 방울 뚝 떨어졌다. 바닥의 먼지 위로 붉은 점이 찍혔다. 그는 비틀거리면서도 녹아내린 창살 사이로 걸음을 내디뎠다. 신체 내부의 모든 신경이 끊어지는 듯한 감각이 뇌를 자극했다.
"계속하십시오. 아이린."
그는 숨을 들이켜며 안경을 고쳐 썼다. 안경다리가 닿는 관자놀이가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법정으로 가는 길은 이미 피로 닦여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 길을 끝까지 걷는 것뿐입니다."
에라스무스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레온하르트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으나 끝내 침묵을 지켰다. 대신 떨리는 손으로 마법 지팡이를 고쳐 쥐었다.
"결투 재판까지 남은 시간은 세 시간입니다."
레온하르트가 복도 바닥에 흩어진 서신 조각들을 밟으며 나아갔다. 발소리가 차가운 복도에 일정하게 울렸다. 각오를 다지는 말 따위는 필요 없었다. 그의 망막에는 이미 카엘의 목에 들이밀 법전의 조항들이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아이린. 앞장서십시오."
아이린은 대답 대신 검을 고쳐 쥐었다. 그녀의 신형이 복도 끝 어둠 속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레온하르트는 자신의 팔에서 느껴지는 고동을 느꼈다. 그것은 살아남으려는 본능이 아니라, 무너뜨려야 할 적을 향한 논리의 박동이었다.
지하 감옥을 빠져나오자 차가운 밤공기가 폐부를 찔렀다. 아델가드의 성벽 위로 드래곤의 실루엣이 보였다. 거대한 날개가 달빛을 가리며 도시 위를 선회하고 있었다. 하늘에서 들려오는 낮은 포효가 지면을 진동시켰다.
"저들이 보고 있습니다."
에라스무스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공포가 서려 있었다.
"보고 있게 놔두십시오. 법은 원래 만인에게 공개되어야 하는 법이니까요."
레온하르트는 피 묻은 소매를 가다듬었다. 멀리 광장 쪽에서 수많은 횃불이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결투 재판을 구경하기 위해 모여든 군중의 소음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곳에는 카엘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드래곤의 축복을 가장한 저주를 품에 안은 채로.
레온하르트의 시선이 성 중앙의 시계탑에 머물렀다.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매 순간 수천 명의 생명이 모래시계의 모래알처럼 빠져나가고 있었다.
"카엘 폰 아델가드."
그의 입술이 차갑게 일그러졌다. 그것은 미소라기보다는 칼날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당신이 세운 그 오만한 법정에서, 당신의 목을 치겠습니다."
레온하르트는 광장을 향해 첫발을 내디뎠다. 그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희미한 푸른 잔영이 남았다. 아티팩트의 힘이 팔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심장이 조여드는 감각이 선명해질수록 그의 정신은 더욱 맑아졌다.
그때였다. 광장 한가운데서 거대한 기둥 모양의 빛이 하늘로 솟구쳤다. 결투 재판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동시에 도시 전체를 감싸는 거대한 마법 결계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발락의 의식이 시작된 것이었다.
"시간이 없어요!"
아이린이 소리치며 군중 사이를 파고들었다. 레온하르트 역시 걸음을 빨리했다. 인파를 헤치고 나아가자 중앙 무대에 선 카엘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화려한 법복을 입은 채 군중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 뒤로 거대한 용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도 모른 채.
카엘의 시선이 군중 속의 레온하르트와 마주쳤다. 카엘의 눈썹이 비릿하게 올라갔다. 그는 레온하르트의 만신창이가 된 몰골을 보며 비웃음을 지었다.
"늦었군, 아스텔 경. 이미 재판은 시작되었네."
카엘이 단상 위의 의사봉을 들어 올렸다.
"죄인 레온하르트 반 아스텔. 법정 모독과 마법 제한법 위반 혐의로 즉결 처분을 선고한다."
의사봉이 바닥을 때리려는 순간, 레온하르트가 품 안에서 구겨진 서신을 꺼내 높이 치켜들었다.
"이의 있습니다, 대재상!"
그의 목소리가 마법으로 증폭되어 광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군중의 웅성거림이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레온하르트는 단상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갔다. 그의 주변으로 푸른 마나의 파동이 거세게 휘몰아쳤다.
"평화 조약 제1조 1항. 모든 법적 절차는 인류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범위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레온하르트의 눈에서 푸른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당신은 지금 이 조약을 위반하고 있습니다."
카엘의 얼굴에서 여유로운 미소가 사라졌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며 의사봉을 쥔 힘이 들어갔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감히 신성한 법정에서 헛소리를!"
"헛소리인지 아닌지는 이 서신이 증명할 겁니다. 드래곤 발락의 인장이 찍힌 이 학살 계획서가 말입니다."
레온하르트가 서신을 허공으로 던졌다. 에라스무스가 지팡이를 휘두르자 서신의 내용이 거대한 마법 영상으로 광장 하늘에 펼쳐졌다. 사람들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카엘은 당황한 듯 주변을 살피다 소리쳤다.
"조작이다! 저건 반역자의 날조다! 사병들은 당장 저 자를 베어라!"
사병들이 레온하르트를 향해 창을 겨누며 달려들었다. 하지만 아이린이 그들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의 검이 궤적을 그리며 사병들의 무기를 튕겨냈다.
"비켜! 이건 기사단의 명예를 건 싸움이다!"
아이린의 외침과 함께 지하에서 숨어 지내던 자유 기사단원들이 군중 속에서 나타났다. 그들은 가슴에 숨겨두었던 문양을 드러내며 사병들과 충돌했다. 광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레온하르트는 혼란을 뚫고 카엘의 바로 앞까지 도달했다. 그의 팔에 새겨진 룬 문자가 한계치까지 빛나고 있었다. 살점이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이제 당신의 법은 끝났습니다, 카엘."
레온하르트가 카엘의 멱살을 잡아채며 차갑게 속삭였다.
"당신이 숭상하던 그 공포가, 이제 당신을 삼킬 겁니다."
하늘에서 거대한 포효가 들려왔다. 분노한 드래곤 발락이 구름을 뚫고 광장을 향해 하강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날갯짓에 건물들의 지붕이 날아갔다.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사방으로 흩어졌다.
카엘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실성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보아라! 위대한 용께서 오신다! 너희는 모두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아니요."
레온하르트가 카엘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죽는 건 당신과 저 도마뱀뿐입니다."
그는 품 안에서 작은 수정 조각을 꺼내 바닥에 내리쳤다. 그것은 에라스무스와 함께 준비한 '조약 역전의 장치'였다. 수정이 깨지며 아델가드 지하에 매설된 모든 마나석이 공명하기 시작했다.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던 결계가 뒤틀리며 드래곤의 언령을 역으로 흡수하기 시작했다. 발락의 몸 주위에 푸른 사슬이 나타나 그의 날개를 결박했다. 드래곤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지상으로 추락했다.
광장 한복판에 거대한 먼지 구름이 일어났다. 레온하르트는 폭풍 속에서도 카엘을 놓지 않았다. 그는 추락한 드래곤의 눈앞에 카엘을 내던졌다.
"당신이 그토록 원하던 용과의 대면입니다. 마음껏 즐기시죠."
레온하르트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아티팩트의 과부하로 오른팔의 감각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그는 왼손으로 안경을 고쳐 쓰며 아이린을 바라보았다.
"아이린. 끝내십시오."
아이린은 대답 대신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녀의 검날에 서린 푸른 불꽃이 밤하늘을 갈랐다.
추락한 발락이 고개를 들어 레온하르트를 노려보았다. 용의 눈동자 속에는 단순한 분노를 넘어선 기이한 감정이 서려 있었다. 그것은 500년 동안 잊고 있었던 공포였다.
레온하르트는 차가운 시선으로 용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피 묻은 법전을 꺼내 발락의 발치에 던졌다.
"이것으로 조약은 파기되었습니다."
그는 말을 마치고 뒤돌아섰다. 멀리서 카엘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이제부터가 진짜 재판의 시작입니다."
레온하르트가 아이린의 어깨를 짚으며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우리가 직접 쓴 법으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