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줄기가 아스팔트를 두들겼다. 강남대로의 신호등이 붉은 빛을 뿌렸고, 택시들의 경적이 물안개 사이로 짓눌렸다.
강이준은 달렸다.
혁대가 풀린 코트 자락이 빗물을 머금어 무겁게 늘어졌다. 앞서 가는 검은 우산 하나가 인파 사이로 미끄러지듯 멀어지고 있었다. 서도윤의 등. 아르케 타워 로비에서 그가 내뱉은 마지막 말이 아직 고막 안쪽에 걸려 있었다.
'더 이상 당신 근처에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구두 밑창이 물웅덩이를 찼다. 발목까지 차오르는 빗물의 온도를 느낄 겨를이 없었다. 서도윤의 우산이 횡단보도 앞에서 한 번 흔들렸고, 이준은 그 흔들림을 놓칠 수 없다는 확신 하나로 차도 쪽으로 발을 내딛었다.
경적.
금속성의 비명이 고막을 찢었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빗방울을 흰 바늘로 바꿔놓는 순간, 눈부신 흰빛이 이준의 시야를 삼켰다. 그 빛이 번지며 흐려지는 찰나, 다른 빛이 그 자리를 채웠다. 깜빡이는 형광등. 길쭉한 그림자가 바닥에 쏟아지는 복도.
열 살.
뺨에 닿는 건 빗물이 아니라 아버지의 손바닥이었다. 차갑고 넓은 손이 이준의 머리를 자기 가슴팍에 꾹 눌렀고, 복도의 형광등이 깜빡이며 길쭉한 그림자를 바닥에 쏟았다. 헤드라이트의 흰빛과 형광등의 푸른빛이 망막 위에서 한 번 겹쳤다가 분리되었다.
오르트 광고 기획 구관 건물. 지금은 철거된 3층 회의실 복도.
아버지 강민혁의 셔츠에서 담배 연기와 인쇄 잉크 냄새가 섞여 올라왔다. 이준은 그 냄새를 기억한다. 아버지가 사흘째 집에 들어오지 않던 밤, 몰래 따라갔던 그 건물의 냄새.
"민혁이 형, 이러면 형이 끝나."
낮고 갈라진 목소리. 복도 끝에 서 있던 남자는 양복 소매가 구겨질 대로 구겨져 있었고, 서류 뭉치를 두 팔로 안고 있었다. 이준은 그 남자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다. 아니, 기억하지 않으려 했다.
"정민이 너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야."
아버지의 목소리가 이준의 두개골을 통해 울렸다. 가슴에 눌린 채 들었기 때문에 말의 의미보다 성대의 진동이 먼저 몸에 새겨졌다.
"이사회에서 오메가 솔루션 전원 정리해고안 올렸어. 내가 막을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 이 서류, 네가 들고 나가."
서류를 건네는 아버지의 손등. 그 위를 가로지르는 얇은 상처. 아직 피가 마르지 않았다. 회의실 유리문이 깨졌을 때 생긴 상처라는 걸 이준은 훨씬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피의 월요일'이라는 이름이 붙기 전의 밤.
아버지는 서정민을 배신한 게 아니었다. 로열 보드의 정리해고안에 반대표를 던지다 자신의 입지를 잃은 것이었다. 서정민에게 건넨 서류는 오메가 솔루션 팀원들의 재취업 추천서였고, 그것을 마지막으로 강민혁은 업계에서 사라졌다.
이준의 손등에 남은 흉터. 그날 밤 복도에서 아버지를 따라 뛰다가 깨진 유리 파편에 베인 자국. 아버지의 상처와 같은 자리, 같은 모양.
열 살짜리 아이는 아버지가 왜 우는지 몰랐다. 스물아홉의 강이준은 비로소 이해했다.
경적이 다시 울렸다. 누군가의 팔이 이준의 코트 뒷깃을 잡아챘다.
몸이 뒤로 꺾이며 인도 위로 끌려왔다. 무릎이 젖은 보도블록에 부딪혔고, 충격이 정강이를 타고 척추까지 올라왔다. 눈앞에서 택시 한 대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스쳐 지나갔다.
"미쳤어요? 죽을 뻔했잖아!"
뒤에서 이준을 잡아끈 행인이 소리쳤지만 목소리가 빗소리에 묻혔다. 이준은 대답하지 못했다. 무릎을 꿇은 자세 그대로 아스팔트 위에 두 손을 짚었다. 빗물이 손등 위 흉터를 타고 흘렀다.
같은 자리. 같은 모양.
아버지가 서정민에게 서류를 건네던 그 손. 유리에 베인 채로 떨리던 그 손.
'지키려고 했던 거야.'
이준의 입술이 움직였지만 소리는 나지 않았다. 빗물이 입안으로 흘러들었고, 짠맛과 함께 위산이 치밀어 올랐다.
10년 동안 믿었던 서사가 있었다. 아버지는 오메가 솔루션을 버렸고, 서도윤의 아버지를 몰락시켰으며, 그 죄값으로 업계에서 퇴출당했다는 이야기. 이준은 그 서사 위에 자신의 직업을, 동기를, 존재 이유를 쌓아올렸다.
속죄.
서도윤을 지키는 것이 아버지의 죄를 갚는 길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속죄할 죄가 처음부터 없었다면.
이준의 손가락이 보도블록 틈새를 긁었다. 손톱 밑으로 모래와 빗물이 파고들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코트 안주머니에서 반쯤 젖은 종이 한 장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골든 티켓의 복사본. 이미 사용해버린, 돌이킬 수 없는 카드의 잔해. 이준은 그것을 움켜쥐었다. 종이 섬유가 손바닥 안에서 풀어지며 형태를 잃어갔다.
그게 아니었다.
이준은 고개를 들었다. 빗줄기 사이로 횡단보도 건너편이 흐릿하게 보였다. 서도윤의 검은 우산이 멈춰 있었다. 뒤돌아선 채.
서도윤은 경적 소리에 발을 멈추었다.
횡단보도를 건너 카페 처마 밑까지 갔다가, 금속이 찢어지는 듯한 그 소리에 무릎이 굳었다. 우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고, 손잡이의 플라스틱 모서리가 손바닥 살을 파고들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 했다.
돌아보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강이준이라는 사람의 궤도에 다시 끌려 들어가면 이번에는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을, 서도윤의 데이터는 이미 계산을 끝낸 상태였다.
몸이 돌아갔다.
횡단보도 건너편, 인도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사람이 보였다. 코트가 빗물에 완전히 젖어 어깨에 달라붙어 있었고, 고개를 숙인 채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있었다. 주변을 지나는 사람들이 우산을 기울여 그를 피해 갔다.
서도윤의 발이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멈추었다.
'저 사람은 나를 지키려 한 게 아니라 자기 죄를 씻으려 했을 뿐이야.'
그 생각이 발목을 잡았다. 카페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우산 가장자리를 두들겼고, 서도윤은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혀끝에 철 맛이 번졌다.
신호등이 바뀌었다.
강이준이 고개를 들었다. 빗물에 젖은 얼굴이 가로등 불빛 아래서 일그러져 보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차도를 사이에 두고 마주쳤다. 서도윤의 우산을 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준이 입을 열었다. 빗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을 거리였지만 서도윤은 그 입 모양을 읽을 수 있었다. 오래 쳐다본 입이었으니까.
'도윤아.'
서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우산을 내린 채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빗물이 코트 어깨를 적시기 시작했고, 차가운 물이 쇄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신호가 다시 바뀌었다. 택시 한 대가 물을 튀기며 두 사람 사이를 지나갔다.
이준은 일어서지 못했다.
무릎에 힘이 빠져서가 아니었다. 일어서면 걸어가야 하고, 걸어가면 말해야 했다. 그 말을 입 밖에 꺼내는 순간 10년간 세워둔 모든 것이 무너진다는 걸 알았다.
이미 무너져 있었다.
골든 티켓의 복사본이 코트 주머니 안에서 완전히 물에 풀려가고 있었다. 종이 섬유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이준은 그 감촉을 가만히 느꼈다. 아버지가 서정민에게 건넸던 서류도 이렇게 젖어 풀어졌을까.
"도윤아."
이번에는 소리가 났다. 갈라지고 젖은 목소리였지만 빗소리를 뚫었다. 서도윤의 어깨가 움찔하는 게 보였다.
"우리 아버지가 너희 아버지를 배신한 게 아니었어."
목구멍이 조여왔다. 빗물인지 다른 것인지 구분할 수 없는 것이 눈가를 타고 흘렀다.
"지키려고 했던 거야."
서도윤이 우산을 놓았다.
검은 우산이 바람에 밀려 보도블록 위를 굴렀다. 서도윤은 그것을 줍지 않았다. 빗물이 단번에 머리카락을 적셨고, 이마를 타고 눈 위로 흘러내렸다. 서도윤의 입술이 움직였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이준은 차도 한복판을 바라보았다. 아까 자신이 뛰어들었던 그 자리. 택시의 헤드라이트가 남긴 잔상이 아직 망막에 걸려 있었다.
일어설 수 없었다.
몸이 아닌 다른 것이 부서져 있었다. 10년간 자신을 지탱해온 서사, 서도윤 곁에 있을 자격, 그 모든 것이 빗물에 씻겨 하수구로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이준의 어깨가 떨렸다. 처음에는 추위 때문이라고 착각할 수 있을 정도로 미세했지만, 곧 억누를 수 없는 경련이 되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숨을 들이쉬려는데 공기가 목에서 걸렸다. 내뱉으려는데 소리가 함께 새어 나왔다.
울음이었다.
강이준은 강남대로 한복판, 빗물이 고인 인도 위에 무릎을 꿇은 채 울었다. 소리를 죽이려 했지만 실패했다.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려다 흉터가 시야에 들어왔고, 그 순간 또 한 번 숨이 꺾였다. 아버지의 손등. 유리에 베인 상처. 떨리면서도 서류를 건네던 손가락.
지키려다 잃은 사람.
그 아들인 자신은 속죄한다며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었던 건 아닌지.
서도윤은 움직이지 않았다.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무너지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빗물이 시야를 가렸고, 가로등 불빛이 물방울 사이로 산란하여 강이준의 윤곽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배신이 아니라 보호였다고?'
서도윤의 손가락이 허벅지 옆에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셔츠 소매 안쪽까지 빗물이 스며들어 피부에 달라붙었고, 손목 안쪽의 맥박이 비정상적으로 빨라진 게 느껴졌다.
아버지 서정민은 정리해고 이후 단 한 번도 강민혁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원망도, 그리움도 없이 그저 그 시절 자체를 삭제한 사람처럼 살았다. 서도윤은 아버지의 침묵을 배신당한 자의 자존심으로 해석했다.
그런데 만약 침묵의 이유가 달랐다면.
지켜준 사람을 차마 떠올릴 수 없어서였다면.
서도윤의 시선이 이준의 손등에 닿았다. 거리가 멀어 흉터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 위치를, 질감을, 손가락 끝에 남은 감촉을 기억하고 있었다. 에덴 스카이에서 처음 만졌을 때 이준의 어깨가 떨리던 것까지.
발이 나갔다.
차도 위로 택시가 지나갔다. 서도윤은 멈추지 않았다. 신호등은 빨간불이었지만 오른쪽에서 다가오는 차량의 전조등이 아직 멀었다. 빗물이 구두 안으로 스며들었고, 양말이 차갑게 발등에 달라붙었다.
횡단보도 중간쯤에서 서도윤의 걸음이 느려졌다.
이준이 고개를 들었다. 빗물과 뒤섞인 얼굴. 붉어진 눈. 코트 주머니에서 흘러나온 젖은 종이 조각이 바닥에 붙어 있었다.
서도윤은 그 종이를 알아보았다. 골든 티켓의 복사본. 이준이 자신을 위해 써버린 카드의 마지막 흔적.
무릎이 젖은 아스팔트에 닿았다.
이준의 맞은편에, 같은 높이로 주저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 빗물이 고여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고, 가로등 불빛이 그 위에서 흔들렸다.
"그 말."
서도윤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빗물이 입술을 적셨고,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붙어 시야를 반쯤 가렸다.
"증거가 있어?"
이준이 고개를 끄덕이려다 멈추었다. 증거. 10년 전 복도에서 들은 대화. 아버지의 떨리는 손. 서류를 건네는 장면. 그것은 열 살짜리 아이의 기억일 뿐이었다.
"없어."
이준의 대답은 솔직했다. 목소리가 빗소리보다 작았지만 서도윤에게는 닿았다.
"기억밖에 없어. 그것도 방금 돌아온."
서도윤의 턱이 미세하게 떨렸다. 차가운 빗물 때문이 아니었다. 입안에서 아까 깨문 상처의 철 맛이 다시 번졌고, 그것을 삼키려다 목이 막혔다.
"기억이면 충분한지 아닌지…"
서도윤이 말을 끊었다. 이준의 손등에 시선이 갔다. 흉터 위로 빗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 상처의 기원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해하면 지금까지 쌓아올린 분노의 근거가 사라진다.
분노 없이 이 사람 앞에 서는 법을 서도윤은 몰랐다.
두 사람 사이에 빗소리만 남았다. 강남대로의 택시들이 물을 튀기며 지나갔고, 행인들의 우산이 두 사람을 피해 흘러갔다. 젖은 보도블록 위에 무릎을 꿇은 두 남자를 누군가 스마트폰으로 찍었지만, 둘 다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이준의 코트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이준은 움직이지 않았다. 네 번째 진동이 끊기고, 곧이어 문자 알림음이 짧게 울렸다.
서도윤이 먼저 시선을 내렸다. 이준의 주머니에서 화면 불빛이 젖은 코트 천을 뚫고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이준이 천천히 전화기를 꺼냈다. 화면에 고인 빗물을 소매로 훔쳤다. 문자 하나. 발신자는 최영석 상무였다.
'이사회 조사 과정에서 피의 월요일 당시 내부 녹음 파일 발견됨. 강민혁 전무의 육성. 내일 오전 로열 보드 긴급 소집.'
이준의 손가락이 멈추었다.
서도윤이 그 화면을 읽었다. 고개를 숙인 자세에서 비스듬히 보인 세 줄의 문장. 빗물에 번지는 화면 위로 '강민혁'과 '육성'이라는 글자가 또렷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다시 마주쳤다.
서도윤이 젖은 아스팔트 위에서 손을 뻗어, 이준의 전화기를 쥔 손목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