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바 일렉트로닉스 본사 로비의 대리석 바닥에 빗방울이 번져 있었다. 서도윤은 우산을 접지 않은 채 현관 매트 위에 서서 로비 중앙의 전자 게시판을 올려다보았다. 노바 일렉트로닉스 40주년 기념 화보 — 하단에 나열된 이사회 명단. 그 끝에서 두 번째 이름이 시선을 붙잡았다.
'권혁도, 로열 보드 의장.'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혀끝에 쇠 맛이 번졌다.
이사회 조사 통보 메일이 온 것이 이틀 전이었다. 골든 티켓의 발행 경위를 파고드는 이사회의 움직임을 추적하다 보니, 끝내 이 이름에 도달하고 말았다. 아버지의 해고 통지서에 찍혀 있던 결재 서명. 어린 시절 몇 번이고 손가락으로 더듬었던 그 글씨체가, 지금 눈앞의 공식 명함 디자인 속에 또렷이 살아 있었다.
서도윤은 태블릿을 꺼냈다. 새벽 네 시부터 정리해둔 파일이 화면에 떠올랐다. 피의 월요일 당시 정리해고 명단, 결재 라인, 그리고 권혁도가 서명한 최종 승인서의 스캔본. 이 자료를 오늘 오후 노바 일렉트로닉스 광고주 미팅 자리에서 공개하면, 로열 보드 의장의 과거가 낱낱이 드러난다.
손끝이 차가웠다. 우산 손잡이를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태블릿 케이스 안쪽에는 접힌 종이 한 장이 끼워져 있었다. 골든 티켓의 사본이다. 강이준이 자신을 위해 써버린 그 종이의 복사본을, 서도윤은 왜인지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종이의 모서리가 닳아 부드러워진 것을 엄지로 더듬었다.
'이걸 쓴 사람의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를 죽인 거야.'
죽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해고 이후 아버지는 업계에서 완전히 매장되었고, 그 뒤로 한 번도 제대로 일어서지 못했다. 서도윤이 데이터 다이브를 처음 익힌 것은 열다섯 살 때였다. 아버지의 서재에 쌓인 광고 자료를 뒤지며, 이 업계가 어떤 구조로 사람을 삼키는지를 숫자로 이해하려 들었던 밤들. 그 모든 밤의 기원에 '권혁도'라는 이름이 있었다.
서도윤은 우산을 접었다. 빗물이 손목을 타고 소매 안쪽으로 스며들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로비의 보안 게이트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데, 뒤쪽에서 구두 소리가 빠르게 따라붙었다.
"서도윤."
강이준의 목소리였다. 서도윤은 멈추지 않았다.
"내가 연락을 안 받으니까 직접 온 거야?"
"메일 봤어. 네 메일 계정에서 노바 본사 미팅룸 예약 기록이 연동 알림으로 떴다."
서도윤의 발걸음이 한 박자 느려졌다. 돌아보지는 않았다.
"연동을 끊어야 했는데."
"그래, 끊었어야지."
강이준이 서도윤의 옆으로 나란히 섰다. 로비의 형광등이 그의 얼굴에 차가운 빛을 드리웠다. 셔츠 소매가 비에 젖어 팔뚝에 달라붙어 있었고, 왼쪽 손등의 흉터가 젖은 피부 위에서 유독 선명하게 도드라져 보였다.
서도윤의 시선이 그 흉터 위에 잠깐 머물렀다가, 의식적으로 떨어져 나갔다.
"비켜."
"어디 가는 건데."
"알 필요 없어."
"오후 세 시 미팅룸 B. 노바 측 임원 세 명 참석 예정. 거기서 뭘 하려고?"
서도윤이 처음으로 발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강이준의 눈이 가까웠다. 서도윤의 태블릿 화면이 아직 꺼지지 않은 채 옆구리에 들려 있었고, 강이준의 시선이 그 화면 위를 스쳤다.
"그 파일."
"보지 마."
서도윤이 태블릿을 몸 뒤로 감추듯 돌렸다. 강이준의 손이 먼저 뻗었다. 빗속을 달려온 탓에 아직 채 마르지 않은 손바닥이 서도윤의 손목 위를 덮쳤다. 차갑고 축축한 열기가 맥박이 뛰는 자리에 그대로 얹혔다. 서도윤의 피부 아래로 강이준의 체온이 스며드는 것이 느껴졌다. 서도윤은 반사적으로 손목을 비틀어 빼내려 했지만, 그 손의 힘이 생각보다 단단했다.
"놔."
"피의 월요일 결재 서명 자료야. 권혁도 의장 것."
서도윤의 턱이 굳었다. 강이준이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이 목구멍 안쪽을 뜨겁게 달궜다.
"그래서 뭐. 알면서 왜 와."
"네가 지금 뭘 하려는 건지 모를 것 같아서?"
강이준이 손목을 놓았다. 서도윤의 손목에 강이준의 손가락 자국이 붉게 남아 있었다. 서도윤은 그 자국을 내려다보았다가 고개를 들었다.
"로열 보드 의장이 아버지를 해고한 실제 서명자야. 이사회 공식 기록에는 없는 이름이지. 누군가 의도적으로 지웠어."
"알아."
"알아? 알면서 가만히 있었어?"
서도윤의 목소리가 반 톤 올라갔다. 로비를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잠깐 쏠렸다가 돌아갔다. 강이준은 서도윤의 팔꿈치를 잡아 로비 한쪽의 기둥 뒤로 이끌었다. 서도윤은 끌려가면서도 뿌리치지 않았다.
기둥 뒤편은 에스컬레이터 소음이 가까웠다. 기계음이 두 사람의 대화를 묻어줄 만큼의 소음을 만들었다.
"여기서 폭로하면 끝이야. 너만 끝나는 게 아니라 프로젝트 제니스가 통째로 날아가."
"알아."
"공동 책임 연대제 잊었어? 나도 같이 날아간다고."
"그것도 알아."
서도윤의 눈이 건조했다. 분노라기보다는 오랜 시간 굳어버린 무언가가 갈라지는 표정이었다. 입술 끝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목소리는 오히려 낮아졌다.
"당신 아버지는 살았지만, 우리 아버지는 그날 죽었어."
강이준의 어깨가 미세하게 내려앉았다. 흉터가 있는 왼손이 무의식적으로 오른쪽 소매를 움켜쥐었다.
"……나도 그걸 모르는 게 아니야."
"모르는 게 아니면 뭐가 달라. 아는 것과 겪는 건 다르잖아."
서도윤이 태블릿을 들어 올렸다. 화면에 권혁도의 서명이 선명하게 찍힌 문서가 떠 있었다. 강이준이 서도윤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덮어 화면을 눌러 내렸다.
"이러면 네가 블랙리스트에 올라."
"올라가면 어때."
"네 아버지가 원했던 게 이거야?"
서도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그 흔들림이 가라앉기 전에 서도윤의 손이 강이준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세게는 아니었지만 강이준이 반 걸음 뒤로 밀려났다.
"아버지 얘기는 하지 마."
"서도윤."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그 흉터가 속죄라고 생각해? 당신 손등에 새겨진 그게 뭔데. 그게 아버지한테 무슨 의미가 있는데."
말이 쏟아질수록 서도윤의 숨이 거칠어졌다. 에스컬레이터의 기계음이 두 사람 사이를 감쌌다. 강이준은 밀려난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왼손의 흉터 위를 엄지로 세게 누르고 있었다. 피부 아래로 오래된 흉터 조직이 딱딱하게 맞섰다.
"자격은 없어."
강이준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서도윤의 호흡이 한 번 끊겼다.
"자격은 없는데, 네가 여기서 무너지는 건 못 봐."
"무너지는 게 아니야. 되찾는 거야."
서도윤이 돌아섰다. 보안 게이트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강이준이 뒤에서 서도윤의 팔뚝 전체를 감싸 안는 힘으로 끌어당겼다. 서도윤의 등이 기둥에 부딪혔다. 둔탁한 소리가 났다.
두 사람의 거리가 좁혀졌다. 강이준의 젖은 셔츠에서 빗물과 커피가 섞인 냄새가 올라왔다. 서도윤의 콧등에 강이준의 숨결이 닿았다.
"비켜, 강이준."
"안 비켜."
"……비키라고."
서도윤의 손이 강이준의 어깨를 잡고 밀어냈다. 강이준이 버텼다. 서도윤의 손가락이 강이준의 쇄골 근처를 파고들었고, 강이준의 턱이 고통으로 살짝 일그러졌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저 사람이 뭘 했는지 알아? 서명 하나로 스물세 명을 길바닥에 내앉혔어. 우리 아버지는 퇴직금도 못 받았어. 업계에서 이름이 지워졌고, 그 뒤로 한 번도—"
서도윤의 목소리가 끊겼다. 목 안쪽이 조여들었다. 말이 더 나오지 않았다. 입술을 다물었다가 다시 벌리는데, 소리 대신 거친 호흡만 새어 나왔다.
강이준의 손이 서도윤의 어깨에서 미끄러져 내려왔다. 서도윤의 팔꿈치 안쪽에 닿았다가 멈추었다. 그 접촉이 너무 조심스러워서 서도윤의 이가 딱 소리를 내며 맞물렸다.
"동정하지 마."
"동정이 아니야."
"그러면 뭔데."
강이준이 대답하지 못했다. 삼 초가 흘렀다. 에스컬레이터가 멈추고 다시 돌아가는 소리만 반복되었다.
침묵이었다.
서도윤은 그 침묵 속에서 태블릿 케이스 안쪽의 골든 티켓 사본을 손끝으로 만졌다. 닳아 부드러워진 종이의 감촉이 손가락 끝에서 번졌다. 강이준이 자신을 위해 10년을 간직하다 써버린 종이. 그 무게가 손바닥 위에서 비현실적으로 가벼웠다.
'이것 때문에 멈추면 안 돼.'
서도윤은 태블릿을 가슴에 안았다. 강이준의 팔을 뿌리쳤다. 이번에는 진심으로, 힘을 주어.
강이준이 비틀거렸다. 기둥 모서리에 등이 부딪히며 짧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서도윤은 돌아보지 않았다. 보안 게이트를 향해 걸었다. 뒤에서 강이준의 목소리가 따라왔다.
"서도윤, 이건 함정이야. 차성민이 너를—"
서도윤은 로비의 자동문을 밀었다. 바깥으로 쏟아지는 빗줄기가 한꺼번에 얼굴을 때렸다. 차가운 물이 눈두덩을 타고 턱 아래로 흘러내렸다. 셔츠가 순식간에 등에 달라붙었고, 태블릿을 감싼 양팔이 빗속에서 떨렸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강이준은 기둥에 기댄 채 자동문이 닫히는 것을 지켜보았다. 왼쪽 손등의 흉터가 욱신거렸다. 오래전에 아물었던 상처가 다시 벌어지는 것처럼, 피부 아래에서 열이 치밀었다. 엄지로 흉터를 눌렀지만 통증이 가라앉지 않았다.
주머니 속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화면을 꺼내 보았다. 차성민이 보낸 메시지였다.
'오후 미팅룸 B에 노바 측 임원 외 특별 참관인 1명 추가. 권혁도 의장 본인.'
강이준의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멈추었다. 빗물이 화면 위로 떨어져 글자를 흐렸다가 다시 선명해졌다. 자동문 너머로 서도윤의 뒷모습이 빗속에서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강이준은 젖은 손으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리고, 자동문을 향해 뛰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