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페우스 벙커의 비상등이 붉은 맥박처럼 깜빡였다. 지하 2층 특유의 냉기가 콘크리트 벽을 타고 내려와 발목을 감쌌고, 서버랙 열두 대가 내뿜는 팬 소음이 저주파처럼 흉골을 눌렀다.
강이준은 노트북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왼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손가락 끝이 접힌 종이 한 장에 닿았다. 골든 티켓을 사용한 뒤 이사회가 발급한 확인서, 이미 효력을 다한 문서였지만 버리지 못했다. 종이의 모서리가 손톱 밑을 찔렀다.
등 뒤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서도윤이었다. 둘 사이에는 서버랙 하나가 칸막이처럼 놓여 있었고, 어느 쪽도 먼저 그 거리를 좁히지 않았다.
"탭의 서버 주소, 세 번째 노드까지 추적했어."
서도윤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감정이 아니라 데이터를 읽는 톤. 태블릿 위에서 손가락 두 개가 로그를 훑어 내려갔다.
강이준이 고개를 돌렸다. 서도윤의 옆모습이 서버랙 틈새로 잘려 보였다. 광대뼈 아래 그림자, 충혈된 눈 가장자리. 이사회 조사 통보 이후 서도윤도 잠을 못 잔 게 분명했다.
"어디까지."
"VPN 세 겹. 마지막 하나가 안 뚫려."
강이준이 의자를 밀고 일어섰다. 서버랙을 돌아 서도윤 쪽으로 걸어가자 서도윤의 어깨가 미세하게 경직되는 게 보였다. 허락 없이 공간에 들어오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 그걸 알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태블릿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트래픽 로그가 스크롤되고 있었고, 세 번째 노드의 IP는 해외 프록시를 경유해 국내로 돌아오는 구조였다.
"이건 단순 VPN이 아니야."
"알아. 패킷 구조가 이중으로 암호화돼 있으니까."
서도윤이 태블릿을 가슴 쪽으로 당겼다. 강이준의 시선을 차단하려는 동작이었다.
"내가 풀고 있으니까 건드리지 마."
"네 방식대로 하면 시간이 부족해."
강이준이 곧장 자신의 노트북을 들고 옆자리에 앉았다. 서도윤의 턱 근육이 단단하게 조였다. 서버랙 팬이 한 차례 회전수를 올리며 소음이 커졌다.
강이준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미끄러졌다. 패킷 스니퍼를 실행해 트래픽을 캡처하기 시작했다. 데이터 스트림이 검은 화면 위로 쏟아졌고, 그 사이에서 반복되는 패턴 하나를 잡아냈다.
"여기. 이 타임스탬프 간격 봐."
강이준이 노트북 화면을 서도윤 쪽으로 기울였다. 각도를 맞추느라 몸을 가까이 당기자, 강이준의 숨결이 서도윤의 귓가를 스쳤다. 서도윤은 잠시 시선을 피하다가 결국 고개를 돌려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두 사람의 어깨가 거의 닿을 듯한 거리. 서도윤의 체온이 셔츠 소매를 통해 희미하게 번져 왔다.
"30초 간격으로 핑을 보내고 있어. 자동화된 스크립트야."
"그건 나도 봤어."
서도윤이 태블릿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강이준의 화면 위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손톱이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 손가락이 특정 로그 라인에서 멈췄다.
"문제는 여기야. 핑 응답 패킷에 메타데이터가 숨겨져 있어. 네 스니퍼로는 그걸 못 잡아."
"잡을 수 있어. 필터를 바꾸면."
"바꿔봤자 헤더만 읽혀. 페이로드 안쪽은 별도 복호화가 필요해."
강이준이 필터 설정을 변경했다. 서도윤의 말이 맞았다. 헤더 정보만 출력될 뿐, 페이로드는 깨진 문자열로 쏟아졌다.
서도윤이 코끝으로 짧게 숨을 내쉬었다. 비웃음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이 맞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에 오는 피로에 가까운 호흡이었다.
"내 복호화 스크립트를 쓰면 20분이면 돼. 그런데 네가 자꾸 끼어들면 로그가 꼬여."
"끼어드는 게 아니라 검증하는 거야."
"검증?" 서도윤이 의자를 뒤로 밀며 강이준을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내 작업을 신뢰 못 하겠다는 소리지."
공기가 달라졌다. 서버랙의 팬 소음이 갑자기 멀어진 것처럼,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이 공간을 잡아먹었다.
강이준은 대답 대신 손등의 흉터를 엄지로 눌렀다. 서도윤의 시선이 그 동작을 따라갔다. 에덴 스카이에서 그 흉터에 손가락을 갖다 대던 밤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은 옥상이 아니라 지하였고, 바람 대신 서버의 열기가 얼굴을 덮었다.
"신뢰 문제가 아니야."
"그럼 뭔데."
"네 스크립트가 방화벽 로그에 흔적을 남길 수 있어. 언더그라운드 탭 쪽에서 역추적하면 우리 IP가 노출돼."
서도윤의 입술이 얇게 닫혔다. 반박하려다 멈춘 표정이었다. 손가락이 테이블 위를 한 번 두드렸고, 그것은 서도윤이 상대의 말을 인정할 때 무의식적으로 보이는 리듬이었다.
"그러면 어쩌자는 건데."
"우회해. 탭의 핑 스크립트를 역이용해서 응답 패킷에 우리 코드를 심어. 탭 서버가 스스로 복호화 키를 뱉게 만드는 거야."
서도윤이 고개를 기울였다. 턱선 아래로 그림자가 깊어졌다.
"역감염이네."
"그래."
"위험해. 탭 서버에 보안 트리거가 걸려 있으면 데이터가 통째로 날아가."
강이준이 노트북을 닫았다. 딸깍, 소리가 벙커 안에서 메아리쳤다.
"내 방식이 마음에 안 들면 지금이라도 그 장부 들고 이사회로 가."
서도윤의 눈이 좁아졌다. '장부'라는 단어가 공기 중에 못처럼 박혔다. 이사회 조사에 제출할 수 있는 골든 티켓 관련 서류, 그것을 무기로 쓸 수 있다는 암시. 강이준의 목소리에는 협박이 아니라 선택지를 던지는 건조함이 담겨 있었다.
서도윤이 의자에서 일어섰다. 강이준보다 반 뼘 낮은 시선이 정면에서 부딪혔다. 목덜미에 땀이 배어 있었고, 셔츠 칼라가 한쪽만 접혀 있었다.
"이사회에 갈 거였으면 여기 안 내려왔어."
양보였다. 강이준은 알았다. 서도윤이 양보라는 단어를 얼마나 싫어하는지도.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았다. 서버랙 하나를 사이에 두던 거리가 팔꿈치 하나 간격으로 줄었다. 강이준이 코드를 짜는 동안 서도윤은 패킷 구조를 분석해 삽입 지점을 특정했다. 키보드 소리가 번갈아 울렸고, 가끔 한쪽이 멈추면 다른 쪽이 화면을 가리키며 수정을 지시했다.
서도윤의 손가락이 강이준의 노트북 화면 위를 스쳤다. 손톱 끝이 LCD 표면에 닿는 가벼운 소리. 강이준은 그 손가락의 궤적을 따라 시선을 옮겼고, 의미 없이 그 손등의 핏줄을 세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집중해야 했다.
주머니 속 확인서의 모서리를 한 번 더 눌렀다. 종이가 약간 구겨지는 촉감이 정신을 붙잡아 주었다.
"삽입 지점 확인. 여기로 넣어."
서도윤이 좌표를 불렀다. 강이준이 코드를 실행했다. 화면에 진행률 바가 떴다. 3%, 7%, 12%. 느렸다. 서버 응답이 예상보다 지연되고 있었다.
15%에서 멈췄다.
등줄기로 찬 기운이 훑고 지나갔다. 서도윤이 태블릿을 집어들고 트래픽 모니터를 확인했다.
"탭 서버가 응답 패턴을 바꿨어. 핑 간격이 30초에서 15초로 줄었어."
"감지된 건가."
"아직은 아냐. 자동 방어 프로토콜이야. 시간이 없어."
서도윤의 손가락이 태블릿 위에서 춤추듯 움직였다. 데이터 다이브. 수만 개의 로그가 스크롤되는 화면을 서도윤은 읽는 게 아니라 느끼는 것처럼 훑었다. 눈동자의 움직임이 규칙적이다가 갑자기 한 지점에서 정지했다.
"찾았어. 방화벽 규칙에 예외 포트가 하나 있어. 8443."
"그걸로 우회?"
"우회가 아니라 관통이야."
서도윤이 직접 강이준의 노트북 키보드에 손을 뻗었다. 손가락이 겹칠 뻔한 찰나, 강이준이 손을 뗐다. 의도적인 양보가 아니었다. 서도윤의 손끝에서 번지는 열기가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이게 했을 뿐이었다.
서도윤의 타이핑은 강이준과 달랐다. 정확하고 빠르되, 리듬이 없었다. 기계처럼 일정한 간격. 코드가 수정되고, 포트가 변경되고, 진행률 바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18%. 34%. 51%.
벙커 안의 공기가 서버 열기로 무거워졌다. 강이준은 셔츠 두 번째 단추를 풀었다. 땀방울 하나가 쇄골을 타고 흘러내려 셔츠 안쪽으로 스며들었다. 그 경로를 따라 패브릭이 피부에 달라붙었다. 서도윤은 미동도 없이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관자놀이의 핏줄이 미세하게 뛰고 있었다.
67%. 82%.
"거의 다 됐어."
서도윤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떨림 비슷한 것이 섞였다. 강이준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91%. 96%.
화면이 깜빡였다. 진행률 바가 사라지고, 검은 화면 위에 흰 텍스트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복호화된 데이터. 언더그라운드 탭의 관리자 계정 정보, 접속 로그, 연동된 외부 서비스 목록.
서도윤이 스크롤을 내렸다. 강이준이 화면을 함께 들여다보았다. 어깨가 맞닿았고, 이번에는 어느 쪽도 피하지 않았다.
관리자 계정의 복구 이메일 주소가 화면 하단에 떴다.
강이준의 손가락이 멈췄다. 서도윤의 호흡이 끊겼다.
j.hwang_exec@nova-electronics.co.kr
노바 일렉트로닉스. 프로젝트 제니스의 최대 광고주. 그 임원의 개인 메일이 언더그라운드 탭의 관리자 계정과 연동되어 있었다.
서도윤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강이준과 눈이 마주쳤다. 비상등의 붉은 빛이 서도윤의 홍채 위로 번졌다.
"이거, 차성민 이사가 알면."
말이 끝나기 전에 강이준이 노트북 화면을 캡처했다. 손가락이 정확하고 빨랐다. 증거를 확보하는 속도였다.
벙커 입구의 카드 리더기가 삐, 하고 울렸다.
누군가 지하 2층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강이준이 노트북을 닫았고, 서도윤이 태블릿 화면을 꺼버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철제 문을 향했다.
구두 뒤축이 콘크리트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한 발자국씩 가까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