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케 타워 지하 3층. 설계도에도 없는 복도 끝에서 강이준의 손가락이 멈췄다.
카드키 리더기에 녹이 슬어 있었다. 10년은 됐을 것이다. 서도윤이 뒤에서 태블릿의 청사진을 확대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화면의 푸른 빛이 그의 턱선을 따라 흘렀다.
"여기가 맞아?"
"언더그라운드 탭이 보내준 좌표랑 일치해."
강이준이 주머니에서 꺼낸 건 만료된 보안카드였다. 아버지 강민혁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사원번호 옆에는 '아카이브 접근 허가 A등급'이라는 문구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카드를 리더기에 대자 0.5초간 정적이 흐르고, 녹슨 잠금장치가 끼익 소리와 함께 풀렸다.
서도윤의 눈이 카드 위의 이름에 머물렀다가 떠났다. 입술을 한 번 깨물었을 뿐이었다.
문이 열리자 먼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축축한 콘크리트 벽. 형광등 하나 없는 공간이었다. 강이준이 휴대전화 손전등을 켜자 금속 선반들이 줄지어 나타났다. 선반마다 라벨이 붙어 있었는데, 대부분 잉크가 번져 읽을 수 없었다.
서도윤이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장갑을 끼지 않은 손으로 선반 위의 상자를 꺼내더니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VHS 테이프 여섯 개와 서류 묶음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2014년 3분기 이사회 비공개 속기록."
서도윤이 서류 첫 장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걸 강이준은 놓치지 않았다. 그 떨림이 추위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강이준은 반대편 선반으로 갔다. 손전등 빛을 따라 2014-Q4, 2015-Q1 라벨을 훑다가 한 상자 앞에서 멈췄다. '2014-특별 안건: 구조조정 시나리오 원본(대외비 1급)'이라고 적힌 라벨. 테이프로 봉인되어 있었지만 한쪽 모서리가 이미 뜯겨 있었다.
누군가 먼저 열어본 적이 있다.
그 사실이 목 뒤의 솜털을 곤두세웠다. 강이준은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나머지 테이프를 벗겼다.
서류 묶음 위에 포스트잇 하나가 붙어 있었다. 누렇게 변색된 종이에 볼펜으로 적힌 메모.
'시나리오 B-7 채택. 오메가 솔루션 라인 전원 정리. 책임 소재: 강민혁 이사에게 단독 귀속시킬 것. —R.B.'
R.B. 로열 보드.
강이준의 엄지가 왼손 손등의 흉터를 세게 눌렀다. 오래된 습관이었다. 뼈에 닿을 것처럼 깊이 파고든 압력이 손가락 끝까지 저릿하게 퍼졌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서도윤."
목소리가 평소보다 반 톤 낮았다. 서도윤이 자신의 서류에서 고개를 들었다. 강이준이 포스트잇을 내밀자 서도윤의 시선이 그 위를 훑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 읽을 때 그의 호흡이 가늘어졌다.
"시나리오 B-7이 뭔데."
강이준이 상자 안의 서류를 펼쳤다. A4 용지 스물네 장 분량의 문서였다. 첫 페이지 상단에 '로열 보드 전략기획실 작성'이라고 명시되어 있었고, 그 아래로 구조조정 대상자 명단과 일정표, 언론 대응 시나리오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서도윤이 강이준의 옆으로 왔다. 어깨가 닿을 만큼 가까웠지만 둘 다 그걸 의식할 여유가 없었다. 서도윤의 손이 명단 세 번째 줄에서 멈췄다.
서정민. 기획 2팀. 해고 사유: 성과 미달.
그 옆에 연필로 누군가 메모를 남겨놓았다. '실제 사유 아님. 내부 고발 차단 목적.'
서도윤의 입술이 굳었다. 턱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게 보였다. 그가 서류를 잡은 손에 힘을 주자 종이가 구겨졌고, 강이준이 조용히 그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구기면 증거로 못 써."
담담한 말투였다. 하지만 강이준의 손바닥이 서도윤의 손등에 닿아 있는 시간은 필요 이상으로 길었다. 서도윤이 천천히 손가락의 힘을 풀었고, 구겨진 종이가 펴지며 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시나리오 B-7의 핵심은 명확했다.
오메가 솔루션 출신 기획자 전원을 성과 미달이라는 명목으로 정리하되, 그 결정의 책임을 당시 기획 총괄이었던 강민혁 한 사람에게 전가한다. 로열 보드는 배후에서 손을 뗀다. 강민혁이 업계의 비난을 홀로 감당하게 되면, 그의 발언권은 소멸하고 로열 보드의 권력은 공고해진다.
일석이조.
서도윤이 뒷장으로 넘겼다. 거기에는 '피의 월요일' 이후의 사후 처리 매뉴얼이 있었다. 해고 대상자들의 퇴직금 산정 기준이 적혀 있었는데, 법정 최저치보다 낮은 금액이 빨간 펜으로 밑줄 쳐져 있었다.
"이걸 보면."
서도윤의 목소리가 건조했다. 감정을 의도적으로 걷어낸 톤이었다.
"네 아버지도 피해자였다는 소리네."
강이준이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상자 바닥에 깔려 있던 VHS 테이프 한 개를 꺼냈다. 라벨에는 '2014.10.13. 로열 보드 긴급 회의 녹화'라고 적혀 있었다. 피의 월요일 사흘 전 날짜였다.
서도윤이 태블릿을 꺼내 테이프 라벨의 사진을 찍었다. 셔터 소리가 밀실에 울렸다. 한 장, 두 장, 세 장. 그는 서류의 모든 페이지를 촬영하기 시작했고, 강이준은 나머지 상자들을 하나씩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세 번째 상자에서 봉투 하나가 나왔다. '수신: 강민혁. 발신: 로열 보드 의장실.' 봉인이 뜯겨 있었다. 안에는 짧은 편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이 결정에 동의하지 않을 경우, 귀하의 아들에 대한 인사 조치를 검토할 수밖에 없음을 통보합니다.'
차가워졌다. 손끝이.
편지의 날짜는 2014년 10월 12일. 피의 월요일 나흘 전이었다. 아버지가 해고안에 서명한 것은 10월 16일. 그 사이 나흘 동안 강민혁이 무엇을 견뎠을지, 강이준은 알 것 같았다. 주머니 속 VHS 테이프의 모서리가 허벅지를 눌렀다. 차갑고 단단한 감촉이었다. 손등의 흉터가 욱신거렸다.
"이준."
서도윤이 태블릿 촬영을 멈추고 그를 불렀다. 강이준의 시선이 편지에 고정되어 있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나한테 보여줘."
강이준이 편지를 건넸다. 서도윤이 읽는 동안 밀실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환기구조차 없는 공간이었다. 먼지 입자가 휴대전화 불빛 속에서 느리게 떠다녔다.
서도윤이 편지를 내려놓았다. 잠시 천장을 올려다보더니 느리게 숨을 내쉬었다.
"우린 지금까지 서로를 죽이려 싸웠던 게 아니라, 그들의 각본대로 춤춘 거였어."
그 말이 콘크리트 벽에 부딪혀 낮게 울렸다. 강이준이 고개를 돌려 서도윤을 봤다. 서도윤의 눈이 젖어 있지는 않았다. 대신 그 안에 뭔가 단단한 것이 자리 잡고 있었다. 분노도, 슬픔도 아닌. 결심에 가까운 무언가.
"그래."
강이준의 대답은 짧았다. 하지만 그가 주머니 속의 만료된 보안카드를 꺼내 바닥에 내려놓는 동작에는 무게가 있었다. 아버지의 이름이 적힌 카드. 그것은 더 이상 출입 수단이 아니라 증거의 일부가 되었다.
"이걸 가지고 나가면 로열 보드가 가만있을 리 없어."
서도윤이 태블릿을 품에 안으며 말했다. 촬영한 이미지가 서른일곱 장. 클라우드 동기화는 지하라 불가능했다. 이 공간을 나가기 전까지 데이터는 태블릿 한 대에만 존재했다.
"원본은 여기 두고 가자. 사본만 가져가면 우리가 조작했다고 뒤집을 수 있으니까."
강이준이 서류를 다시 상자에 정리하며 말했다. VHS 테이프는 주머니에 넣었다. 테이프의 모서리가 허벅지에 닿는 감촉이 아까보다 더 선명했다. 이 차가운 무게를 들고 살아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그 감촉에 실렸다.
서도윤이 서류를 제자리에 넣다가 손을 멈췄다. 상자 안쪽 바닥에 작은 포스트잇이 하나 더 붙어 있었다. 이번 것은 앞의 것과 필체가 달랐다. 둥글고 정돈된 글씨.
'이 자료가 필요한 날이 올 겁니다. 부디 바른 사람의 손에 닿기를. —S.J.'
S.J.
서도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서정민. 아버지의 이니셜이었다.
그의 손가락이 포스트잇 위를 천천히 쓸었다. 10년 넘게 이 어둠 속에 묻혀 있었을 아버지의 흔적. 종이에서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시간이 모든 것을 말려버린 뒤였다.
강이준이 서도윤의 옆에 섰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어깨를 서도윤의 어깨에 닿게 두었을 뿐이었다. 서도윤이 그 접촉을 밀어내지 않았다.
침묵이었다.
삼십 초쯤 흘렀을까. 서도윤이 포스트잇을 조심스럽게 떼어 태블릿 케이스 안쪽에 끼워 넣었다. 그리고 상자 뚜껑을 닫으며 입을 열었다.
"복수를 하려고 했었어. 네 아버지한테. 너한테도."
"알고 있었어."
"지금은."
서도윤이 강이준을 봤다. 밀실의 어둠 속에서 휴대전화 불빛이 그의 얼굴 절반만 비추고 있었다.
"같이 부수고 싶어. 이 각본 자체를."
강이준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웃음이라고 부르기엔 쓸쓸하고, 동의라고 부르기엔 뜨거운 표정이었다.
"그러려면 살아서 나가야지."
그가 문 쪽으로 몸을 돌린 순간, 서도윤의 손이 그의 팔을 잡았다.
"잠깐."
서도윤의 귀가 문 쪽을 향했다. 그의 감각은 데이터만을 읽는 게 아니었다. 공간의 미세한 변화를 포착하는 능력이 그에게는 있었다. 복도 쪽에서 희미한 진동이 전해졌다. 환기구를 타고 내려오는 기계음이었다.
그리고 철컥.
문 바깥에서 잠금장치가 걸리는 소리.
강이준이 문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움직이지 않았다. 한 번 더. 금속이 삐걱거릴 뿐 열리지 않았다.
천장 구석에서 붉은 빛이 점멸하기 시작했다. 보안 경고등이었다. 아까까지 꺼져 있던 것이 누군가의 원격 조작으로 활성화된 것이다. 붉은 빛이 밀실 안을 한 박자마다 물들이고 거두기를 반복했다.
서도윤이 태블릿을 확인했다. 와이파이 신호 없음. 셀룰러 신호 없음. 지하 3층의 콘크리트가 모든 통신을 차단하고 있었다.
복도 저편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한 명이 아니었다. 정돈된 보폭, 균일한 간격. 보안팀의 것이었다.
강이준이 주머니 속 VHS 테이프를 움켜쥐었다. 서도윤이 태블릿을 재킷 안쪽에 깊이 밀어 넣으며 문에서 한 발 물러섰다.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붉은 경고등 아래로 두 사람의 그림자가 벽 위에서 겹쳤다 갈라졌다를 되풀이했다.
문 너머에서 무전기의 잡음이 새어 나왔고, 차성민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밀실 안으로 흘러들었다.
"기록 보관소 출입 로그가 올라왔습니다, 강 팀장님. 아버지의 카드를 쓰셨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