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계단의 콘크리트 벽이 등을 긁었다. 강이준은 멈추지 않았다. 두 계단씩 뛰어내렸다. 태블릿 화면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아카이브실 문이 열렸다. 운이었다. 정전이 아니라 가변형 벽체 시스템의 정기 리셋 타이밍, 매주 수요일 새벽 두 시에 전력이 재분배되는 그 45초.
숨이 턱까지 찼다. 계단참의 비상등이 붉은 빛을 쏟아냈다. 그 아래서 자신의 손등이 보였다. 흉터 위로 식은땀이 흘렀다. 엄지가 그 위를 눌렀다가, 이번에는 의식적으로 손을 떼었다.
지금은 아니다.
태블릿 화면에 언더그라운드 탭의 익명 게시판이 떠 있었다. 접속 상태를 나타내는 초록 점이 깜박였다. 새벽 두 시, 오르트 광고 기획의 전 사원 중 이 시간에 이 게시판을 보고 있는 인원은 최소 서른두 명. 강이준은 그 숫자를 알고 있었다. 6화에서 확인한 정보 조작의 흔적들, 그 뒤를 추적하며 익힌 탭의 트래픽 패턴이었다.
12층 계단참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가쁜 호흡을 억지로 고르며 벽에 등을 기댔다. 콘크리트의 차가운 감촉이 등골을 타고 내려왔다. 태블릿을 무릎 위에 올리고 게시판의 글쓰기 버튼을 눌렀다.
제목란에 다섯 글자를 쳤다.
골든 티켓.
본문은 짧았다. 라이브 스트리밍 예약 링크 하나. 시간은 오전 아홉 시, 아르케 타워의 전 층 모니터와 연동되는 유니온 라운지의 방송 시스템을 경유하는 경로. 그리고 한 줄.
'내일 아침, 이 티켓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밝힙니다.'
전송 버튼을 누르는 손끝이 떨리지 않았다. 떨릴 여유가 없었다.
게시글이 올라간 지 4분 만에 조회수가 200을 넘었다. 강이준은 비상계단에 주저앉은 채 그 숫자가 올라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300, 450, 700. 익명 댓글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대부분은 낚시라는 조롱이었고, 일부는 강이준의 아이디를 특정하려는 시도였다.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접힌 종이 한 장이었다. 골든 티켓. 10년간 지갑 안쪽에 넣어 다녔던 탓에 모서리가 닳아 있었다. 아르케 타워의 워터마크가 비상등 아래서 희미하게 빛났다. 이 종이 한 장의 무게를 처음 실감한 건 옥상에서였다. 서도윤의 기획안을 살리기 위해 사용했을 때, 손에서 빠져나가는 감각이 마치 심줄이 끊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지금, 이 종이는 다시 그의 손 안에 있었다.
'사용 완료' 도장이 찍혀야 할 우측 하단이 비어 있었다. 이사회의 행정 처리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차성민이 골든 티켓의 발행 경위를 조사하겠다고 나선 바람에 최종 승인이 보류된 상태. 그 틈새가 강이준에게는 유일한 칼날이었다.
아직 유효하다.
태블릿에 알림이 떴다. 발신자 없음. 내용은 단 한 줄이었다.
'서버 접근 권한 48시간 내 차단 예정. 로열 보드 긴급 결의.'
두 번 읽었다. 세 번째는 필요 없었다. 로열 보드가 '예정'이라는 단어를 쓸 때는 이미 실행에 옮긴 뒤였다.
일어섰다. 무릎이 욱신거렸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비상계단을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지하 2층, 모르페우스 벙커. 그곳의 구형 서버 단말기는 중앙 감시 시스템의 사각지대에 있었다.
지하 2층의 공기는 달랐다. 환기구에서 나오는 바람이 축축하고, 형광등 세 개 중 하나가 끊어져 복도 한쪽이 어둑했다. 강이준은 벙커의 출입 패널에 사원증을 댔다. 빨간 불. 권한 정지.
예상한 대로였다.
주머니에서 꺼낸 건 서도윤의 사원증이었다. 옥상에서 서로의 상처를 확인하던 그날 밤, 서도윤이 건넨 것. '혹시 모르니까.' 그 한마디와 함께 내민 카드를 받아들 때 손끝이 스쳤던 온기가 아직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
초록 불. 문이 열렸다.
벙커 안은 좁았다. 간이침대 두 개와 구형 모니터, 먼지가 쌓인 키보드. 강이준은 의자를 끌어당기며 모니터 전원을 켰다. 부팅음이 낮게 울렸다. 이 단말기는 오르트 광고 기획의 초창기 인트라넷에 직결되어 있었다. 중앙 감시 시스템이 업그레이드될 때 누락된 레거시 장비.
라이브 스트리밍의 경로를 재설정하기 시작했다. 유니온 라운지의 방송 시스템은 로열 보드가 차단하겠지만, 아르케 타워의 빌딩 관리 서버를 경유하면 각 층의 비상 안내 모니터까지 신호를 보낼 수 있었다. 광고 기획사답게, 타워 전체의 디스플레이 권한은 오르트가 쥐고 있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손가락 끝에서 열기가 올라왔다. 식은 커피 한 잔 없이. 오로지 화면의 코드만이 그의 정신을 붙들었다.
새벽 세 시 반. 경로 설정 완료. 방송 예약 시간, 오전 아홉 시 정각.
강이준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형광등의 잔광이 눈에 맺혔다. 이 방송이 시작되면 되돌릴 수 없다. PT 서열제에서 쌓아온 발언권도, 프라임 존의 전면 통유리도, 레거시 베네핏이 보전해주던 안전망도 전부 사라진다.
괜찮다.
손등의 흉터를 내려다보았다. 이번에는 누르지 않았다. 대신 그 위로 서도윤의 손가락이 닿았던 감촉을 떠올렸다. 에덴 스카이에서, 바람이 불던 그 순간. 서도윤의 손끝이 흉터의 윤곽을 따라 움직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시간.
그 침묵이 어떤 말보다 무거웠다.
오전 여덟 시. 아르케 타워의 로비에는 평소와 같은 출근 인파가 흘러들었다. 엘리베이터 앞에 줄을 서는 사람들, 커피를 든 손, 이어폰을 낀 귀. 아무도 지하 2층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랐다.
강이준의 태블릿에 메시지가 쏟아지기 시작한 건 여덟 시 이십 분이었다.
첫 번째는 최영석 상무였다. '강 팀장, 지금 어디 있나. 전화 받게.' 두 번째는 프라임 존의 팀원. '팀장님 사원증 위치 추적이 서브 존으로 잡히는데요.' 서도윤의 카드를 쓴 탓이었다. 세 번째.
차성민 이사의 이름이 화면에 떴다.
'라이브 방송 예약 건 확인했습니다. 오전 아홉 시 이전에 자진 철회하지 않으면 징계위원회에 회부합니다. 이것은 경고가 아니라 통보입니다.'
강이준은 그 메시지를 읽고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구형 모니터의 화면에는 방송 대기 상태를 알리는 카운트다운이 돌아가고 있었다. 37분 12초.
벙커의 문이 열렸다.
돌아보지 않아도 알았다. 그 발소리의 간격과 구두 뒤축이 바닥을 찍는 각도. 결벽증에 가까울 만큼 정확한 보폭.
"여기 있을 줄 알았어."
서도윤이었다.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채, 손에는 노트북을 들고 있었다. 밤을 새운 흔적이 역력했다. 눈 아래 그림자가 짙었고, 입술이 마른 채로 갈라져 있었다.
"내 사원증으로 들어왔으면 연락이라도 하지."
"연락하면 올 거라는 보장이 없었으니까."
서도윤이 코웃음을 쳤다. 그 입꼬리에는 비꼼 대신 다른 것이 섞여 있었다. 강이준은 그것의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게시판 봤어?"
"전 사원이 봤겠지."
서도윤이 간이침대에 노트북을 올려놓고 화면을 열었다. 강이준의 게시글 아래 달린 댓글 목록이 스크롤을 내려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로 한 가지 정보가 강이준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이거."
서도윤의 손가락이 한 댓글을 가리켰다. 익명 계정, 작성 시간 새벽 네 시 십칠 분. '노바 일렉트로닉스 차기 캠페인 대행사 내정 완료. 오르트 탈락.' 그 아래 첨부된 스크린샷에는 노바 측 임원의 내부 메일이 찍혀 있었다.
강이준의 손가락이 멈췄다.
노바 일렉트로닉스는 프로젝트 제니스의 핵심 광고주였다. 이 프로젝트의 성패가 노바의 연간 대행 계약권과 직결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미 내정이 끝났다? 오르트가 탈락했다고?
"차성민."
서도윤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름만으로 충분했다.
5화에서 스친 복선이 되살아났다. 노바 일렉트로닉스 임원과 로열 보드 사이의 밀약. 차성민이 양쪽을 오가며 조율한 그림이 이제야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프로젝트 제니스는 처음부터 성공하도록 설계된 과제가 아니었다. 두 팀장을 공동 책임으로 묶어놓고 실패시키는 것, 그것이 진짜 목적이었다.
차가운 것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분노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밑바닥에 있는, 이름 붙이기 어려운 감각.
"알고 있었어?"
서도윤에게 물었다. 서도윤은 노트북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확신은 없었어. 데이터가 부족했으니까."
인사이트 리딩의 달인답게, 서도윤은 숫자로 증명되지 않는 것을 함부로 단언하지 않았다. 그 목소리에 깔린 떨림은 숫자로 치환할 수 없는 것이었다.
카운트다운이 25분을 가리켰다.
"방송 내용 바꿔야 해."
강이준이 말했다. 골든 티켓의 발행 경위를 밝히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차성민과 로열 보드의 구조적 부패, 노바와의 밀약, 프로젝트 제니스의 기만적 설계까지 전부 드러내야 했다.
서도윤이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데이터는 내가 가지고 있어."
서도윤이 노트북을 돌려 보여주었다. 화면에는 지난 세 달간 서도윤이 데이터 다이브를 통해 추적한 애드 크레딧의 흐름도가 펼쳐져 있었다. 로열 보드 계정에서 외부로 빠져나간 크레딧의 경로, 그 종착점에 노바 일렉트로닉스의 자회사 이름이 찍혀 있었다.
"언제부터 추적한 거야."
"3화, 로열 보드가 기획안 전면 수정을 지시한 날부터."
서도윤의 입술이 희미하게 올라갔다. 비꼬는 웃음이 아니었다. 전장에 나서는 병사의 얼굴이었다. 강이준은 그 표정을 처음 보았다.
"내 피드백 습관 기억해? 기획안에 몰래 메모를 남기는 거."
강이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2화부터 시작된 서도윤의 버릇. 기획안의 여백에 연필로 남긴 미세한 숫자들, 강이준은 그것을 한동안 서도윤의 비아냥으로 오해했었다.
"그게 전부 추적 로그야. 크레딧 이동 시간과 금액을 기획안 페이지 번호에 맞춰 암호화해둔 거지."
호흡이 한 박자 늦어졌다. 서도윤이 그 오랜 시간 동안 혼자서 쌓아온 것의 무게가 공기를 통해 전해지는 듯했다.
카운트다운. 18분.
태블릿에 새 메시지가 떴다. 최영석 상무. '강 팀장, 마지막 기회입니다. 안경을 닦으며 시간을 벌 여유가 나한테도 없어.' 평소의 중립적인 어조가 아니었다. 최영석도 압박받고 있다는 뜻이었다.
"서버 차단은?"
서도윤이 물었다.
"로열 보드가 움직이고 있어. 중앙 감시 시스템을 통해 유니온 라운지 방송을 끊으려 할 거야."
"그래서 빌딩 관리 서버를 경유한 거지?"
강이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서도윤이 노트북 키보드 위로 손을 올렸다.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경로를 이중으로 만들고 있었다. 하나가 차단되면 다른 하나가 살아남도록.
"이거 실패하면 블랙리스트야."
강이준이 말했다. 감정을 빼고 사실만 전달하는 목소리였다. 업계 영구 퇴출.
서도윤의 손가락이 멈추지 않았다.
"알아."
두 글자. 그것으로 충분했다.
카운트다운이 10분 아래로 내려갔다. 강이준은 주머니에서 골든 티켓을 꺼내 구형 모니터 옆에 세워두었다. 닳은 모서리, 아르케 타워의 워터마크. 방송이 시작되면 이 종이를 카메라에 비출 것이다.
"이 티켓의 마지막 사용처는 당신들의 퇴진입니다."
강이준이 중얼거렸다. 리허설이었다. 서도윤이 타이핑을 멈추고 옆을 보았다.
"그 대사, 본방에서도 그 톤으로 해."
"톤?"
"지금 그 목소리.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사실을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
강이준은 서도윤을 바라보았다. 형광등의 잔광 아래서 서도윤의 눈동자가 모니터 빛을 받아 유리처럼 반사되었다. 그 안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낯설었다. 두려움도 분노도 아닌, 어떤 고요한 것이 거기 있었다.
카운트다운. 3분.
서도윤이 노트북에서 USB를 뽑아 강이준에게 건넸다. 크레딧 추적 데이터 전체가 담긴 것이었다. 강이준이 받아들 때 손가락이 스쳤다. 서도윤의 손끝은 차가웠다. 밤새 키보드만 두드린 손이었다.
"보안 코드."
서도윤이 말했다.
"방송 시스템의 최종 인증은 두 사람의 사원증이 동시에 인식돼야 해. 공동 책임 연대제의 역이용이야."
강이준이 짧게 웃었다. 두 사람을 묶어놓은 족쇄가 이제는 방패가 되려 하고 있었다. 서도윤이 자신의 사원증을 단말기의 좌측 슬롯에 꽂았다. 강이준은 서도윤에게서 돌려받은 사원증을 우측 슬롯에 넣었다.
화면에 인증 대기 표시가 떴다.
"같이 누르자."
서도윤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강이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엔터 키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서도윤의 손가락이 그 옆에 나란히 놓였다. 두 손가락 사이의 거리, 1센티미터도 되지 않는 간격에서 체온이 오갔다.
카운트다운. 10초.
5.
4.
3.
서도윤이 엔터 키를 눌렀다. 강이준의 손가락이 그 위를 덮었다.
구형 모니터의 화면이 한 번 깜박인 뒤, 빨간 점이 초록으로 바뀌었다. LIVE 글자가 떠올랐다.
동시에 아르케 타워 15층부터 20층까지, 복도의 비상 안내 모니터가 일제히 켜졌다. 로비의 대형 스크린이 광고 영상 대신 지하 벙커의 화면을 송출하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 내부의 소형 디스플레이까지. 출근길의 사원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화면 속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나란히 앉은 강이준과 서도윤. 그 사이에 놓인 닳은 골든 티켓 한 장.
강이준이 입을 열었다.
"이 티켓의 마지막 사용처는 당신들의 퇴진입니다."
15층 프라임 존의 모니터 앞에서 차성민이 손톱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멈추었다. 그의 뒤로 태블릿을 든 최영석이 안경을 벗어 셔츠 자락에 문지르며 화면을 응시했다.
방송 시작 47초 만에, 서도윤의 노트북에 알림이 떴다. 노바 일렉트로닉스 공식 계정에서 발신된 긴급 성명서. 서도윤의 눈동자가 화면 위를 훑는 속도가 느려졌다. 입술이 굳었다.
강이준이 옆에서 그 화면을 읽었다. '오르트 광고 기획과의 모든 협력 관계를 즉시 중단하며, 프로젝트 제니스 관련 일체의 법적 책임을 오르트 측에 귀속한다.'
서도윤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라이브 방송의 카메라가 그 떨림까지 잡아내고 있었다. 아르케 타워 전역의 모니터에 두 사람의 얼굴이 비치는 가운데, 서도윤이 강이준의 소매를 잡아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