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도윤의 오피스텔은 테헤란로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있었다. 강이준은 그 사실을 이틀 전까지 몰랐고,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이 이곳에 서 있다는 게 실감되지 않았다.
현관을 지나 서재로 들어서자 희미한 잉크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 정렬된 파일 박스들, 색인 탭이 붙은 바인더. 서도윤의 성격 그 자체였다. 한 치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는 공간.
어젯밤 차성민 이사가 서도윤에게 건넨 말이 아직도 귓속에 맴돌았다. 퇴사 통보. 골든 티켓 발행 경위에 대한 이사회 조사가 시작되자마자 차성민은 서도윤을 먼저 잘라내는 쪽으로 칼날을 돌렸다. 기밀 유출 의혹의 당사자라는 명목이었다. 서도윤은 통보를 받고 아무 표정 없이 아르케 타워를 나섰고, 강이준은 그 뒷모습을 쫓지 못했다.
그래서 지금, 그의 오피스텔에 와 있다. 서도윤이 약국에 다녀온다며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강이준은 서재 한가운데 서서 숨을 골랐다. 서도윤이 허락한 공간은 거실의 소파뿐이었다. 서재에 들어오지 말라는 말을 직접 하진 않았지만, 그의 결벽에 가까운 정리 습관을 아는 이상 이건 침범이었다. 손끝이 차가워졌다. 그래도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책상 위에 서도윤의 태블릿이 충전 중이었다. 화면은 꺼져 있었고, 그 옆에 가지런히 놓인 만년필 두 자루와 포스트잇 묶음. 강이준의 시선이 책상 구석으로 미끄러졌다. 파일 박스 하나가 다른 것들과 달리 색인 탭 없이 놓여 있었다. 뚜껑이 반쯤 열린 채.
손을 뻗지 않으려 했다. 검지가 박스의 모서리에 닿은 건 의지와 무관한 움직임이었다.
뚜껑을 들어 올리자 오래된 종이 냄새가 올라왔다. 누렇게 변색된 서류들, 법원 도장이 찍힌 봉투, 그리고 맨 위에 놓인 한 장의 카드. 인사기록 카드였다. 모서리가 접히고 커피 자국이 번진 그것은 적어도 십오 년은 된 물건이었다.
카드 상단에 '오르트 광고 기획 인사기록부'라는 활자가 찍혀 있었다.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성명: 서정민. 직급: 수석 기획자. 소속: 기획 2팀.
서도윤의 아버지. 이미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카드 하단의 특이사항란이 강이준의 시선을 붙잡았다. 붉은 잉크였다. 누군가 직접 눌러 쓴 필체가 종이 섬유 속으로 파고들어 있었고, 획의 끝마다 분노가 굳어 있었다. 잉크가 번진 자리는 두 번, 세 번 덧칠해진 흔적이 역력했다. 마치 한 번 쓰는 것으로는 부족했던 것처럼.
'피의 월요일 관련 — 정리해고 결정권자: 강민혁. 사유: 기밀 유출 혐의(미확인). 처분: 즉시 해고 및 업계 블랙리스트 등재.'
그 아래 한 줄이 더 있었다. '배신자.' 두 글자. 잉크가 종이 뒷면까지 배어 나올 만큼 힘주어 눌러 쓴 글자였다. 누군가의 이를 악문 시간이 그 두 글자 안에 응고되어 있었다.
강이준의 엄지가 왼쪽 손등의 흉터를 눌렀다. 세게. 피부 아래 뼈가 저릿하게 울릴 때까지. 배신자. 그 두 글자가 아버지의 이름 바로 아래에 낙인처럼 찍혀 있었다. 서도윤의 아버지에게 찍힌 낙인이 아니었다. 문맥상 그것은 강민혁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버지가 배신자?
카드를 쥔 손가락 끝에 미세한 진동이 왔다. 종이가 바스락거렸다. 흉터 위의 엄지에 더 힘이 들어갔다.
박스 안에는 카드 외에도 여러 문서가 있었다. 강이준은 한 장씩 넘겼다. 내부 감사 보고서 사본, 당시 이사회 회의록의 일부, 해고 통지서의 복사본. 모두 서정민과 관련된 서류였고, 모든 문서에 강민혁의 이름이 결정권자로 반복 등장했다. 그리고 몇몇 문서의 여백에 서도윤의 필체가 보였다. 날짜와 함께 적힌 메모들.
'2019.03 — 법률 자문 거절.'
'2020.11 — 업계 복귀 시도 실패.'
'2022.06 — 강민혁 측 접촉 불가.'
연대기였다. 서도윤이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벌여온 기록의 연대기. 최소 5년이었다. 서도윤은 5년 동안 이 기록들을 수집하고 정리하며 강민혁이라는 이름을 추적해 왔다.
강이준의 등줄기를 타고 냉기가 흘렀다. 에어컨 바람이 아니었다.
서도윤이 오르트 광고 기획에 입사한 이유. 기획 2팀의 팀장 자리를 고집한 이유. 프로젝트 제니스에 목숨을 걸었던 이유. 모든 것이 이 박스 안의 서류들로 수렴했다.
나를 향해 웃었던 건, 커피를 건넸던 건, 옥상에서 내 손등의 흉터를 만졌던 건——
숨을 들이마셨다. 들이마신 공기가 폐 안에서 돌처럼 굳었다. 내쉬지 못했다.
카드를 내려놓으려는데 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았다. '배신자'라는 두 글자 위에 서도윤이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은 흔적이 선명했다.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었다. 펜 자국이 종이를 파고들어 뒷면까지 비쳐 보일 정도로. 그 위에 또 그은 흔적. 그 위에 또.
서도윤에게 강민혁은 아버지의 인생을 파괴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강이준은 그 사람의 아들이었다. 에덴 스카이에서 나눈 대화가, 모르페우스 벙커에서 어깨를 맞대고 밤을 새운 시간이, 전부 다른 의미로 뒤집혔다.
서도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강이준의 이름을 듣고도, 흉터를 보고도, 골든 티켓을 받아들이고도. 전부 알면서.
현관 쪽에서 비닐봉지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열쇠가 돌아가는 금속음. 강이준은 카드를 박스에 넣지 못한 채 그 자리에 굳었다. 서도윤의 발소리가 복도를 지나 거실을 가로질렀다. 소파에 앉아 있어야 할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하는 데 3초면 충분했을 것이다.
서재 문 앞에서 발소리가 멈췄다.
강이준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손에 들린 인사기록 카드, 열린 박스, 흩어진 서류. 변명의 여지가 없는 광경이었다.
"거실에 있으라고 했는데."
서도윤의 목소리는 낮았다. 평소의 비꼬는 톤이 아니었다. 감정을 전부 걷어낸 뒤에 남는 건조한 진술. 강이준은 그 목소리를 회의실에서 한 번 들은 적 있었다. 차성민 이사가 기밀 유출 의혹을 제기했을 때, 서도윤이 보인 반응과 같은 종류의 것.
강이준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서도윤은 문틀에 기대 서 있었다. 비닐봉지를 든 왼손이 축 늘어져 있었고, 오른손은 주머니에 넣은 채. 표정이 없었다. 눈동자만이 강이준의 손에 들린 카드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이건——"
"네 아버지 이름이 적힌 거 봤지."
서도윤이 말을 잘랐다. 비닐봉지를 바닥에 내려놓는 동작이 느렸다. 약봉지가 바닥에 닿는 둔탁한 소리가 서재의 정적을 갈랐다.
"너, 이걸 보고도 나랑 웃으면서 커피를 마신 거야?"
강이준의 입술이 달라붙었다. 질문의 주어가 뒤집혀 있었다. 서도윤이 해야 할 말을 강이준이 먼저 뱉었다. 카드를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얘졌다.
서도윤의 턱 근육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 말은 내가 해야 할 말인데."
"알고 있었잖아. 처음부터."
강이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건조하게 갈라진 틈 사이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목구멍이 조였다.
"내 성이 강이고, 아버지가 강민혁이라는 것. 이 흉터가 그날과 관련 있다는 것. 전부 알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
서도윤이 문틀에서 등을 뗐다. 한 발짝. 서재의 공간이 좁아졌다.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책상이 바리케이드처럼 가로막고 있었지만, 서도윤의 시선에는 장애물이 없었다.
"말하면 뭐가 달라졌을 것 같아?"
"최소한 나는——"
"넌 뭘 했을 건데. 사과? 속죄? 골든 티켓을 쓴 것처럼 또 네 방식대로 면죄부를 끊었겠지."
날이 선 유리 같은 어조였다. 평소의 냉소와는 다른 것이었다. 강이준은 반사적으로 한 발 물러섰고, 등이 책장에 부딪혔다. 바인더 하나가 기울어져 옆으로 쓰러졌다.
서도윤의 눈꺼풀이 떨렸다. 자신의 서재가 어지럽혀진 것을 보는 순간 입술 끝이 실처럼 가늘게 떨린 것을 강이준은 놓치지 않았다. 서도윤은 바인더를 세우지 않았다. 대신 책상을 돌아 강이준 앞으로 왔다.
두 걸음 거리. 서도윤의 손에서 약국 비닐의 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소독약 같은 것.
"돌려줘."
서도윤이 손을 내밀었다. 강이준은 카드를 건네려 했으나, 손가락이 종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배신자'라는 글자 위에 겹쳐진 형광펜 자국이 시야에 박혀 있었다.
"이 기록이 전부야? 아버지가 진짜 기밀을 유출한 건지, 강민혁이 누명을 씌운 건지, 너는 어디까지 알고 있어?"
서도윤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침묵이었다. 오래된 건물의 배수관이 울리듯, 침묵이 공간을 채웠다. 서도윤의 눈동자 안에서 무언가가 빠르게 계산되고 있었다. 데이터 다이브. 수만 개의 변수를 직관적으로 분석하는 그의 능력이 지금 이 순간에는 강이준이라는 단 하나의 변수에 집중되어 있었다.
"내 아버지는 기밀을 유출하지 않았어."
서도윤이 말했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미확인이라고 적혀 있잖아. 혐의만 있었고 증거는 없었어. 그런데도 강민혁은 해고를 밀어붙였지. 블랙리스트까지."
강이준의 엄지가 다시 흉터를 눌렀다. 뼈 위를 지나는 통증이 현실을 붙잡아 주었다.
"왜."
"뭐가 왜?"
"왜 아버지가 그랬는지, 나는 모르겠어."
그 말이 나오자 서도윤의 표정에 처음으로 균열이 생겼다. 입술이 열렸다가 닫혔고, 턱선을 따라 근육이 긴장했다. 서도윤은 시선을 내렸다. 강이준의 손에 들린 카드가 아니라, 그 아래의 손등. 흉터가 있는 왼손.
서재 바깥으로 차 지나가는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오피스텔의 벽시계가 초침을 새겼다. 강이준은 그 소리를 세고 있었다. 하나, 둘, 셋.
서도윤이 움직였다.
카드를 빼앗는 것이 아니었다. 서도윤의 오른손이 강이준의 왼쪽 손목을 잡았다. 빠르고 정확하게. 손가락이 손등 위의 흉터를 덮었다. 체온이 닿는 순간 강이준의 어깨가 경직됐다.
서도윤은 손등을 뒤집지 않았다. 대신 강이준의 손에서 카드를 빼낸 뒤, 카드의 하단을 펼쳐 강이준의 눈높이에 맞추었다.
'배신자'라는 두 글자. 형광펜 자국.
서도윤의 눈이 그 글자 위에 머물렀다. 차갑고, 건조하고, 흔들림 없는 시선이었다. 그러나 강이준의 손목을 잡은 손가락 끝에서 미세한 떨림이 전해왔다. 맥박인지 진동인지 구분할 수 없는 것.
"이게 내 아버지한테 남겨진 전부야."
서도윤이 말했다. 목소리에 기복이 없었다. 분노도 없었다. 그래서 더 무거웠다.
"퇴직금도 없이, 이유도 모른 채, 이 두 글자 하나 달고 업계에서 사라진 사람. 그 사람 아들이 나고."
강이준의 손목 위에서 서도윤의 손가락이 조여들었다.
"그 사람을 지운 자의 아들이 너야."
강이준은 입을 열지 못했다. 흉터 위를 누르는 서도윤의 손가락이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다. 아니, 자신의 피부가 달아오르는 것인지도 몰랐다. 경계가 사라졌다. 서도윤의 맥박이 흉터를 통해 직접 전달되는 것 같은 착각.
서도윤이 카드를 내렸다. 강이준의 손목은 놓지 않았다.
"그래서 물어볼 게 있어."
서도윤의 목소리가 한층 더 가라앉았다. 서재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책장 사이로 스며드는 가로등 빛이 서도윤의 턱선 아래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네 아버지가 내린 결정의 진짜 이유. 너는 알고 있어?"
강이준은 고개를 저었다. 거짓이 아니었다. 아버지 강민혁은 피의 월요일에 대해 한 번도 말한 적이 없었다. 흉터의 유래도, 서정민이라는 이름도, 전부 강이준이 스스로 파헤친 것이었다.
"모른다고?"
"모른다."
"그럼 알아내."
서도윤이 강이준의 손등을 놓았다. 손가락이 떨어지는 순간 흉터 위에 서도윤의 체온이 잔상처럼 남았다.
"네가 알아내지 못하면, 나는 다른 방법을 쓸 거야."
서도윤이 몸을 돌렸다. 바닥에 놓인 비닐봉지를 집어 들며 서재를 나갔다. 복도를 걷는 발소리가 멀어지고, 주방 쪽에서 수도꼭지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강이준은 움직이지 못했다. 왼손이 허공에 남아 있었다. 흉터 위에 서도윤의 손가락 자국이 붉게 올라온 것을 내려다보았다. 다섯 개의 손가락이 찍어낸 자리가 선명했다.
빈 박스 안에서 서류 한 장이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강이준이 허리를 숙여 집어 들었다. 서도윤의 필체가 아닌, 타자로 찍힌 문서였다. 오르트 광고 기획 내부 감사실 직인이 찍혀 있었고, 날짜는 피의 월요일 이틀 후였다.
'강민혁 수석에 대한 내부 고발 접수 — 고발인: [말소].'
고발인의 이름이 검은 마커로 지워져 있었다. 그러나 마커 아래로 희미하게 비치는 글자의 윤곽이 보였다. ㅊ. ㅅ. ㅁ.
강이준의 손가락이 그 위에서 멈추었다.
주방에서 물 잠그는 소리가 났다. 서도윤의 발소리가 다시 복도를 향해 돌아오기 시작했다.